송희영
21세기북스
2021년 8월 2일
졸업하고 연구소에 들어가 처음 참여한 사업의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일이다. 원전 지질조사를 마치면 그 결과로 원전 건설 허가 서류 중 하나인 예비안정성분석보고서(PSAR, Preliminary Safety Analysis Report)라는 걸 작성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작성할 능력이 되질 않아 외국 용역사에서 작성한 걸 번역해 과학기술처에 제출했는데, 선배들이 귀찮다고 신입인 내게 떠넘겨서 더듬거리는 영어로 번역해야 했다.
그때 conservative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다. 사전을 찾아보니 ‘보수적’이라고 나오는데, 지질조사 결과로 지반을 평가한 보고서에 나올 말이 아닌데다가, 국책연구소라 해외 유학파도 적지 않았는데도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조사 결과를 보수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여유를 둬서 안전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지반이 30을 버틸 수 있다면 10 정도만 버티는 걸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접어주는 비율을 안전율(FS, Factor of Safety)이라고 했다.
나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다. 아마 50년대생의 평균적인 성향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희화화된 존재가 되었지만, 한때는 대표 언론으로 여겨졌던 조선일보의 성향이 내게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의에 대해 좀 더 예민해졌고, 해외에서 이방인으로서 십수 년 살아가면서 소수자와 약자에 관한 관심이 커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적인 내 성향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정치적 성향을 진보와 보수로 나눴던 것 같지는 않고 민주와 반민주로 나눴던 것 같다. 그렇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양측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지는 않았고, 학생운동을 하는 소수가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모두 먹고살기 바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2009년 초에 한국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진보와 보수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뉘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지금의 여론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게 맞는지, 진보와 보수를 좌우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맞는지도 불분명하기는 하다.
그런데도 스스로 자신을 보수파라고 여기는 것은 변혁보다는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아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변화되어야 할 목표에도 이의가 없고, 하루빨리 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이 점에서는 진보파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속도가 대다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리하더라도 급격한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다를 뿐. 그래서 나는 진보와 보수를 속도의 차이로 이해한다.
어쩌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이 차이 때문에 나와 진보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변혁을 추구하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걸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그런 주장을 내세웠다는 걸로 만족하거나 그걸 자기 훈장처럼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한다. 그걸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런 이유로 진보를 신뢰하지 않고 때로 의심하면서도 그들을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할 상대로 여기지 않은 일은 없다. 지금처럼 상대를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거나 쓸어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긴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원수로 여기지 않는가.
이쯤 되면 자연히 이런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진보와 보수는 태생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가?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가? 진보는 좌파로, 보수는 우파로 등치(等値)될 수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가 진정한 진보와 보수인가? 진보와 보수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는 없는가?
이런 질문을 풀어보려고 벌써 몇 달째 책을 찾아보고 있다. 하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조명한 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위 논객이라는 이들이 쓴 책이 몇 권 눈에 띄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진영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이니 그들의 생각을 객관적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런 책을 소개해달라는 글도 올려봤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내년에는 이에 대한 책을 좀 읽어보려 한다. 하나씩 차근차근. 오래된 책은 전자책으로 된 게 별로 없고, 전자책으로 나온 건 대체로 진영에서 자유롭지 않은 터라 당장 읽을 수 있는 걸 찾지 못했다. 그러다 찾은 게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송희영이 쓴 이 책이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나름 균형을 잃지 않았다 싶어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국내외 보수주의자 열 명을 골라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중 동의가 되는 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총리 정도였다. 김구 선생을 보수주의자로 설명한 게 의외이긴 해도 나름 수긍할 점이 없지는 않지만, 정주영 회장은 뜬금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수주의자로 꼽은 것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진보는 아니니 보수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진보와 보수를 설명하는데 예로 들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선정한 인물에 대한 견해를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의 주장과 삶에서 저자가 가지고 있는 보수에 관한 생각을 짐작해보려 한다.
“빌리 그래함은 나이가 들면서 설교 내용과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성애, 낙태처럼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에 논란이 격심한 사안에는 말을 아꼈다. 사회적 논쟁이 되는 사안을 언급하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경을 순수하게 전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사망하기 몇 해 전에 타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젊은 시절의 이념투쟁에 대해 반성했다. 자신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으며 일시적이었으나 그것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전부였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잘못이었으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회개했다. 자신의 사명은 복음 전도였는데, 그 행동이 자기 인생과 사역을 망쳤다고 했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 중에 BBC가 영국 군대를 우리 병사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영국군으로 부르고, 전쟁 상대를 적군이라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군대라고 했한 것에 대해 시청료외 세금으로 운영하면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 행위는 반국가적이라고 비난했다. 세상에 공짜 돈은 없으며 오로지 납세자들의 돈뿐이라는 게 대처의 입버릇이었다. 공연 단체에는 대중을 끄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라고 다그쳤고, 국책 연구비가 줄었다고 불평하는 교수들에게 민간 기업에서 연구비를 받아낼 만한 성과를 내라고 반박했다. 또한 모든 책임을 국가와 사회에 미루고 정부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대처에게 납세란 국민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였다. 국민은 납세 행위로 투표권을 행사하고 국가 정책 결정에 자기 의견을 표출할 권한이 확보되며, 그래서 납세야말로 국민이 국가의 주주로서 국정에 참여할 발언권과 참정권 등 기본권을 보장받는 길이라고 믿었다.”
“레이건은 어떤 정부도 민간 기업이나 개인보다 더 창조적으로 일할 수 없다고 믿었다. 능력이 부족한 정부, 정치 권력이 기업 경영과 개인 일상에 개입할수록 경제가 더 나빠진다고 보았다. 그가 내걸었던 철학은 무정부주의가 아니었다. 권력이 기업과 개인의 행동에 될 수 있는 대로 간섭하지 말라는 생각이었다. 레이건의 ‘더 작은 권력, 더 작은 정부’ 철학은 정부와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권력이 한없이 팽창하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이민자들에게 자유란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권리다. 종교 자유, 집회 자유, 언론 자유는 건국 정신의 핵심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레이건은 어떤 권력도 인간이 누려야할 자유를 방해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믿었다.”
“버크는 보수주의자의 창시자로 꼽힌다. 보수주의자라면 결코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탐욕스럽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완벽하지 못하고 실수를 피할 길 없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결함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축적한 경험, 즉 역사와 전통 관습 예의범절에 의지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적 고민은 점진적 개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 질서를 지키려면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되 쉬지 말고 미세 조정을 이어가 급진 혁명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몇몇 의미 있는 대목이 있었지만 그동안 가졌던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저자의 다른 저서인 <진짜 보수, 가짜 보수>는 제목으로 보아 보수의 진면목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들어있을 것 같아서 골라놨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혹시 시간 낭비는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대우조선해양 접대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확정된 기사가 먼저 뜬다. 그 사건으로 조선일보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는데, 그 글 때문에 이 책의 신뢰도 갑자기 떨어졌다.
이 글을 conservative라는 단어로 시작했다. 설명했듯, 보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안전한 쪽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보수적이라는 말이 안전과 안정을 추구한다는 말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스스로 보수라고 여기는 내 판단의 근간이 되었다.
내년은 이 주제에 집중해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혹시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주시라. 읽고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