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교회 민주주의

by 박인식

김광남

비전북

2022년 8월 31일


영혼의 쉼을 얻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어야 하는 교회가 내게는 늘 고단한 곳이었다. 기뻐서 시작한 봉사는 의무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봉사로 인한 고단함보다는 교우들과의 갈등과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견디기 어려웠다.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는 사회의 본보기였다. 그러던 교회가 어느새 신앙이 지향해야 할 바는 안중에도 없고 교회라는 조직의 성장과 안위에만 몰두하느라 오히려 사회의 공적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십수 년 해외 근무로 한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한 걸음 떨어져 있으니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몰랐던 교회의 문제를 비로소 직시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쯤 차별금지법 반대의 광풍이 한국 교회를 휩쓸었다. 더 이상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귀국하면서 중앙루터교회에 신앙의 둥지를 틀었다.


칠십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으니 그저 손님처럼 지내겠거니 생각했지만, 감사하게도 생각 밖의 환대에 힘입어 오래지 않아 교인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루터교회를 염두에 두었던 건 아니다. 귀국해 그동안 설교를 들어왔던 백주년기념교회를 비롯해 청파교회, 삼일교회, 일산은혜교회까지 여러 교회 예배를 참석한 끝에 루터교회로 마음을 굳혔다. 그랬으면서도 예배 전례가 너무 달라 마음을 정하기까지 얼마간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교우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친 교우들이 적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루터교회로 결정하기까지 선택지에 들어있던 교회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니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그것 또한 빠르게 루터교회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교회의 존재 목적은 잊은 지 오래된,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인 의사 결정에 반발해 이혼보다 어렵다는 교회 이적을 감행한 내게 ‘교회 민주주의’는 여생을 안고 고민해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진즉 읽었어야 하는 책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나와 같은 이유로 다니던 교회를 옮긴 저자가 예인교회라는 찾아보기 드문 ‘민주적인’ 교회에서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그곳의 운영과 의사 결정 과정을 소개하고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할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읽으면서 무릎 치며 공감할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교회 민주주의란 뭘까?


얼마 전에 읽은 <민주주의는 만능인가>에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만능이 아닐 뿐 아니라 그 무엇도 보장해 주지 않으며,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찾아오고 실험해 온 여러 정치체제 중 가장 낫다고 알려진, 그러나 아직 최종 판정은 내려지지 않은 정치체제라고 정의한다. 또한 민주주의가 대변하고 있다는 ‘국민의 뜻’이라는 것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생각이 모두 다르니 과연 국민의 뜻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존재한다고 해도 그걸 과연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 반문한다.


그것을 교회라는 세상에 적용하자면 교회는 ‘교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반론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누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을 방패 삼아 자기주장을 내세우듯, 교계의 지도자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방패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이 책은 이름 그대로 교회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지만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교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렸다기보다는 “교회 민주주의의 한 사례로서 예인교회를 든 것”이라고 읽었다. 그것 또한 교회 민주주의라는 정의에 타당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빚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적어도 담임목사 1인, 또는 소수 지도자의 결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민주적인 교회가 아니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회의 존재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당회를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에 권위가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권위는 교인들의 중의를 대표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교회의 직분은 교회 운영에 필요한 기능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항존직인 당회보다는 교인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이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훨씬 합리적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이 다수인 교회에서 여성은 당회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실질적으로 참여가 제한된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갖은 험한 일은 모두 감당하면서도 의견 하나 제기할 변변한 통로가 없는 청년들은 또 어떤가? (같은 이유로 항존직의 존재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만능일 수 없듯 교회의 민주적 운영이 곧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정치체제 중 가장 부작용이 적은 체제인 것처럼, 저자는 교회의 민주적 운영이 적어도 불투명하거나 비상식적인 운영보다 나은 건 확실하다고 강조한다.


예인교회는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는 아니다. 물론 성장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성장은 교회 운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며, 그래서 예인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달리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데, 한국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걷는 데 여러 요인이 있지만, 교인을 탈진하기까지 몰아붙이는 교회 프로그램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인교회에서는 교우 간의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그래서 소그룹인 아둘람을 주일예배와 동등한 공예배로 여기고 교인 모두가 참석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도 참석률은 6할을 맴돈다. 저자는 참석한 6할에 초점을 맞춰 소개하고 있으나 나는 참석하지 않는 4할의 마음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육십 년 넘게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나도 6할보다는 4할에 가까운 편인데, 그것은 교우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적지 않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우의 집에서 모인다는 것도 매우 부담스럽고. 저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은 훨씬 더 공동체적”이라며 그 공동체의 한 형태로서 소모임의 장점을 중점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모임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았을까. 그로 인한 문제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런데도 소모임의 장점이 그 문제점을 덮고도 남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요즘처럼 홀가분한 때가 없었다. 난 그것을 교회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운 교우들은 생각이 달랐다. 은퇴하고 교회 어떤 일에도 간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마저 그렇게 치열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일이 있고, 누군가 그걸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최소화해서 생업과 가정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교회의 할 일이 아닐까.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 건실한 시민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서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지원하는 게 본 역할이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교우 중에는 비슷한 이유로 교회를 옮긴이들이 적지 않다. 교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경제적 여유도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다. 상황이 비슷하니 말이 잘 통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깝게 지낸다. 어느 날, 그것이 패거리로 비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요즘은 각별히 주의하려고 한다. 모이는 빈도도 줄이고,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이 교회의 새로운 계급일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시의적절한 채찍이 아닐 수 없다.


초대 교회에 관한 저자의 관점이 매우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늘의 교회가 본받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라는 주장에 대해) 성경이 묘사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교회가 취한 우발적 존재 양태일 뿐 그 이후의 교회가 모두 따라야 할 규범이 아니다. 이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 인간으로 여기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내게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견디어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생각마저 잊었다가 저자가 한 교우와 천국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대목에서 그 일이 떠올랐다. 저자는 교우에게 천국을 설명하다가 “솔직히 나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있는지 말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지도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더 이상 그 문제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 관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쏠려 있으니 그게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저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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