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by 박인식

유제프 차프스키

류재화 옮김

풍월당

2021년 1월 20일


사놓고 미뤄두었던 책을 현장으로 복귀하는 기내에서 읽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폴란드 귀족 출신의 저자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료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강의록인 이 책은, 자그마한 크기에 본문은 90쪽에 불과해 두어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하소설 중에서도 유독 길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강의 내용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매번 앞 뒷장을 오가야 했다.


1896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한 폴란드 귀족 자제인 저자는 군 복무를 세 번이나 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1916년 귀족 자제로 이루어진 황실부대 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평화주의자로서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군대를 떠난 후 무기를 들지 않는 조건으로 1919년 일반사병으로 재입대한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예비역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 갇혔는데, 여기서 함께 포로가 된 동료들을 대상으로 오직 기억에 의존해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한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대하소설 중에서도 길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문장이 긴 걸로도 유명하다. 전체 내용의 2할 가까운 문장이 열 줄이 넘고, 평균으로도 세 줄 반에 이른다는 그 책을 외워서 강의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내용을 외운 건 아니다. 소설을 해설한 게 아니고, 줄거리를 압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문장을 인용해가면서 강의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프루스트의 핵심 개념인 ‘기억-시간-자아’를 자기 언어로 재구성해 강의한 것이다.


사실 이 책에 관심을 둔 건 강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 강의를 통해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의 동료들이 정신이 파괴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강의를 통해 동료들을 일깨우고 희망을 불어넣으며 투쟁을 조직한 건 아니다. 현실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강의를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강의 때문에 수용소에 갇힌 폴란드군 포로들이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내부 구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 책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중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박용구 선생의 <음악과 인생>이라는 수필이 떠올랐다.


바리톤 이인영이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 열차에서 일어난 일이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서울을 떠나면서 휴대용 축음기와 레코드 몇 장만을 옷과 함께 가방에 꾸려 넣고 피난 화물열차에 올랐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화물칸에서 그가 축음기와 레코드를 꺼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틀었다. 그러자 매서운 겨울바람과 함께 떠들썩하던 화물열차 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지식도, 생활도, 성격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한결같은 감동에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 노래가 여운을 남기고 끝났을 때, 서양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곡을 한 번 더 들려 달라”고 했다던 바로 그 수필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록일 뿐, 정작 내가 궁금해했던 강의를 들은 동료 군인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이 강의의 의미와 성과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저 박용구 선생의 수필에 나오는 화물열차 안의 피난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화물열차 안의 피난민이 음악을 들어본 바 없듯 포로들도 소설을 읽어본 이가 드물었을 거 같기도 하고, 당연히 바흐를 모르듯 프루스트도 모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생존과 무관해 보이는 음악과 소설을 통해 무너질 위기에 맞닥뜨린 인간성을 붙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성이 무너져 내릴 이런 위기의 순간에 위기 극복과는 무관해 보이는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을 통해 오히려 인간성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사례를 이루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잠깐 검색해본 바로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던 막시밀리안 꼴베와 전쟁 중에도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평시와 마찬가지로 연주계획을 세우고, 리허설하고, 규칙적으로 공연을 이어갔던 바르샤바 게토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자인 유제프 차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동료들을 일깨우고 희망을 불어넣고 투쟁을 조직하는 방식이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감시하는 이들이 그걸 용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치밀한 계획에 따라 대안을 마련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들은 당장 자신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막시밀리안 꼴베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기도와 설교와 서로 돌보는 일을 통해 서로를 격려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수감자끼리 수감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 것이 그곳에 갇힌 유대인들을 지탱해준 것이라는 해석이 눈에 띈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 단절된 여성들은 특히 그에 더 공감하는 걸 우리가 모두 익히 보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인문학의 토대인 문사철(문학ㆍ역사ㆍ철학)이 붕괴할 상황이라는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요즘은 K컬쳐 때문에 위상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학ㆍ음악ㆍ미술과 같은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고 배부른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것도 사실 아닌가.


그런데 예술이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배부른 사람의 전유물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은 아닐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책에 정작 내가 궁금했던 내용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이 강의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잠시 사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새해 첫 독서로는 그 의미가 충분해 보인다.


저자의 강의를 들은 동료 군인들은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 갇혔던 폴란드 군인 4천 명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79명에 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릴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전체 7부에 4천 쪽이 넘는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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