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거룩하지 않은 독서

by 박인식

과연 저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분'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분'으로 받아들이는지도 궁금했고.

김광남

올리브북스

2019년 8월 25일


평생 스승으로 여긴 목사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설명하시다가 “언약궤에서 이천 규빗 떨어져 따르라는 말씀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궁금했는데, 실제로 요단강에 가서 보니 강에서 이천 규빗 쯤 떨어진 곳부터 언덕이 시작되더라”고 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언덕에 서게 되고, 거기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설 때 강물이 멈춰 쌓여 서는 모습을 볼 수 있겠더라”며,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계획하신 하나님 섭리에 감격해하셨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그곳을 꼭 가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신명기를 읽을 때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는데도 결국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요단강 건너 가나안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늘 마음이 울컥했다. 모진 고생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턱밑에까지 왔는데, 거길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어느 곳보다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모세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십수 년 전에 요르단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 느보산에 올랐다. 차에서 내려 평지를 조금 걸으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좀 뜨악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모압 광야를 내려다보는데,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장정만 육십만, 적게 잡아도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기엔 턱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기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평생 이과생으로 살아서인지 성경을 읽으며 적지 않은 곳에서 의문과 마주쳐야 했다. 창조과학이라는 희대의 뻘짓을 지켜보면서 성경의 역사성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후로 십 년 넘게 이와 관련한 글을 찾아 읽었다. 적지 않은 갈등과 마주해야 했지만, 오래지 않아 성경은 역사서가 아닌 신앙고백서라는 결론을 얻었고, 이후로 그 갈등은 해소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큐티라는 건 해보지 않았다. 성경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분석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망원경으로 보듯 전체 상황을 조망하며 그 상황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려 들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것은 세밀하게 들여다볼 만큼 성경을 알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서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묵상하며 의미를 깨달아가는 게 자칫 아전인수 격 해석이 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하나 엉뚱한 이유도 있다. 말끝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거나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하는데, 그들이 대부분 큐티에 열심을 쏟기 때문이다.


<거룩하지 않은 독서>라는 이 책의 제목은 큐티의 출발점이 되는 6세기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창안한 성경 읽기 방식인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를 비튼 말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는 큐티로 대표되는 성경 읽기 방식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부정적인 생각인지라 그런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요즘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삶을 위한 좋은 충고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설교자나 교인 모두 성경에 과도한 해석을 가하는데, 그 결과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며 개탄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숲으로 이해하고 성경 전체를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읽어나가기를 권고한다. 아마 ‘하나님의 의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후 저자는 창세기에서 출발해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살피며 ‘하나의 관점’을 찾는데 필요한 도구를 하나씩 소개한다.


우선 총론이라 할 수 있는 성경 조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나 동시에 당대의 지식수준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저자가 기록한 많은 문헌 중에서 선택된 것으로, 당시 저자들은 자기가 성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한 독자’를 대상으로 ‘특정한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틀을 바탕에 두고 구약의 중요 사건인 창조-출애굽-가나안 정복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서술이 아니고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숙고를 거듭했던 기록자들의 신학적 사상이 담겨 있는 종교문학이다. 아담도 노아도 실제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들이다. 셈의 족보에 등장하는 연수는 원 역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연결하기 위해 고안한 문학적 장치일 뿐이다.”


“출애굽기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역사성은 희박하다. 고고학자들이 현대의 첨단 기술을 사용해 조사했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출애굽기는 유다 왕 요시아 시절에 편집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당시 앗수르 제국이 약화한 틈을 타 국토 확장에 매진했던 유다는 남쪽을 위협하는 애굽과 맞서기 위해 백성들에게 신앙심과 애국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주전 7세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주전 13세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역사소설인 셈이다.”


“여리고성 정복을 입증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여호수아서가 전하는 여리고성 전투가 벌어졌을 시기에 그런 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역사’라기보다 ‘신학’이다. 그 신학의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목적 때문에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택하신 그 백성을 그분의 권능으로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는 것이다.”


신약의 가장 큰 이슈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고, 수많은 이적과 함께 가르침을 남기고 끝내 십자가 고난을 받아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사 하늘에 오른 예수’의 역사성일 것이다. 수년 전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두게 되어 적지 않은 책을 섭렵한 일이 있는데, 그런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구약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접했으니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저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분'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분'으로 받아들이는지도 궁금했고.


그러나 저자는 “부활의 역사성을 상세하게 논하는 게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면서 이 책의 주제인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 읽기’에 전념할 것을 환기하는 듯 복음서와 서신서와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두어야 할 주제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간다.


그렇다. 나는 성경의 역사성에 관해 관심을 두고 이 책을 읽어나갔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핵심적인 메시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성경의 역사성에 관한 서술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수단이었을 것이고. 그러니 결과적으로 나는 이 책을 오독한 셈이다.


나는 성경이 유한한 인간의 지식과 언어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섭리를 담으려다 보니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저자의 ‘문학적 장치, 거대한 서사시, 역사라기보다는 신학’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겠고, 거기에 동의하는 바이다. 나는 또한 성경이 어느 순간에 작성된 기록물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구전으로 또는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가감과 윤색이 이루어진 편집물이라는 견해에도 동의하는데, 그런데도 그것이 내 신앙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성경에 관한 바르고 깊은 이해가 오히려 신앙을 북돋을망정.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저자의 서술 일부에 관심을 집중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오독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이 책으로 성경에 관한 이해와 공감이 더욱 깊어졌으니 말이다.


XL (1).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너지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