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긴즈버그의 차별 정의

by 박인식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이나경 옮김

블랙피쉬

2021년 8월 30일


몇몇 젊은 학자들 덕분에 차별과 평등에 관심을 두고 이에 관한 글을 찾아서 읽기 시작한 것이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차이와 차별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성평등이 그렇다. 남성과 여성은 생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차이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그러면 그에 걸맞게 역할을 맡기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바로 성차별의 시작이라는 지적을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지적에 이의가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담아둔 의문까지 모두 지워진 건 아니다.


미국에서 여성 평등권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꼽을 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여성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가로 살았던 건 아니다. 그는 학자로서 논문을 발표하고 법조인으로서 여권 옹호를 위한 소송을 시작했다. 연방 법원과 연방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후에는 현직 대법관 신분으로 사망할 때까지 성평등에 관한 견해를 헌법 해석과 판결에 반영했다. 물론 그가 항상 이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더라도 감명 깊은 소수 의견을 남긴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이 이긴 판결보다도 더 의미 있는 족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2020년 대법원 판사라는 현직 신분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트럼프가 자기 입맛에 맞는 보수 성향의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성 기사를 통해서였다. 그가 현직으로 사망할 때 87세였으니 몇 년 앞서 오바마 때 퇴임하였더라면 진보 진영에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반 비난 반의 기사였다. 물론 당시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고, 설령 트럼프가 승리한다 해도 지금과 같은 기행에 가까운 행보를 보일 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긴즈버그 본인은 충분히 감당할만한 건강과 지적 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면 물러나지 않는다는 사법 윤리를 고수했으며, 대법관은 정치 일정에 맞춰 자리를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진 사임이 대법관직을 정치 거래의 일부로 인정하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연방 대법원은 트럼프가 국제비상경제권한법을 근거로 외국에 높은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한 사안에 관한 판결을 앞두고 있는데, 법리상 당연히 위헌임에도 트럼프의 손을 들어줄 판결이 나올 걸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긴즈버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책 제목만 보고 독서 목록에 넣어놓은 지 벌써 몇 년 되었다. 상당한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판결문과 소수 의견을 모아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안마다 해설을 붙여놓기는 했어도 그 역시 내겐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었다. 의무감으로 반은 읽었고 뒤로 가면서는 건성으로 페이지만 넘겼다.


그래도 그중 사관학교에 여학생 입학을 허용해달라는 소송에서 버지니아 지방법원이 이를 기각한 사건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가졌던 의문과 같은 내용이었기도 하고.


이에 대해 항소하자 항소법원은 버지니아주에 다음과 같은 개선책을 제안했다. “1) 여성을 입학시키거나, 2) 동일한 기관이나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3) 사관학교에 대한 버지니아주의 지원을 중단하고 사립학교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그러자 버지니아주는 2안을 받아들여 여성 리더십 학교를 제안했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버지니아 사관학교 157년의 역사와 특권, 영향력 있는 졸업생 인맥과 관련한 혜택”이다. 미국도 졸업생 인맥이 사회생활의 큰 밑천이라는 말이다.


버지니아주가 받아들인 여성 리더십 학교는 버지니아 사관학교처럼 시민 군인을 양성하는 목표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여기서는 버지니아 사관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엄격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대신 군사교육을 덜 강조하고 자존감을 강화하는 협동적 교육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남녀 간에 심리적 사회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선택과목이나 교수진이나 예산뿐 아니라 동창회의 영향력 면에서 사관학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여성 리더십 학교와 사관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기회가 평등함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게’ 왜 차별인가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여성 리더십 학교의 선택과목이나 교수진, 그리고 예산이 차이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만약 그것이 같은 수준이었더라도 항소법원이 교육 기회가 평등함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판결했을지 매우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판결에 이의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 세상은 그렇다고 판단하니 거기에 따를 뿐이다.


여성 공군 장교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공군 규정에 따라 제대해야 할 상황에 몰리자 그는 출산 직후 아이를 입양 보내겠다는 각서를 제출했음에도 결국은 직위 해제당한 사례는 내 기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오십 년 전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남성은 제대하지 않기 위해서 피임하거나 아버지가 되기를 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될 남성에게 복무를 장려하기 위해 추가 혜택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긴즈버그는 이에 관한 의견서에서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되어서는 안 되는 변경 불가능한 선천적 특성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인종, 혈통, 국적 등 본 대법원이 ‘의심스럽다’고 선언한 기준뿐 아니라 개인의 성별도 이에 포함한다”고 밝혔다. 즉,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변경 불가능한 선천적 특성’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에는 ‘차이’도 포함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직도 문턱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바로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변경 불가능한 선천적 특성’을 이유로 그게 ‘차이’이건 ‘차별’이건 가할 수 없도록 제재하는 장치가 아닌가. 나 또한 바로 이 이유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고.


위에 써놓은 글을 몇 번 다시 읽었다. 생각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게’ 왜 차별인가 했다가,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변경 불가능한 선천적 특성’을 이유로 차이이건 차별이면 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가부장적인 세대의 사람이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정도가 좀 덜할지는 몰라도 태생이 어디로 달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이 들어가며 의식적으로 생각을 바꾸려고 애를 쓴 까닭이 아닐까. 이 책이 그러한 내 노력에 적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십 년 가깝게 지난 일이다. 여동생이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대한광학이라는 회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하였다. 함께 입사한 남성 동기들과 같은 업무를 담당했는데, 급여가 정확하게 절반이었다. 그때 느꼈던 억울함과 당혹감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도 성차별 사례를 거론할 때면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래도 오십 년 지나니 모두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흥분할 만큼 세상이 바뀌기는 했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한다고는 했지만, 성차별이 내 며느리나 손녀들에게 닥친다면 그건 아마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라고 발끈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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