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에 월성 원전을 시작으로 원전 지질조사에 참여했습니다. 원전 조사는 물론 체계적이고 전문적이 조사 경험이 없던 터라 그 후로도 몇 년을 외국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아 가며 조금씩 역량을 키워나갔지요. 마지막으로 받은 기술 자문이 87년 영광 원전 5, 6호기 지질조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오 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칠 년이나 되었군요. 그래도 사십 년 전입니다.
원전 지질조사는 관련 규정이 무척 많고 또한 까다롭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 규정, 미국 연방 규정,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규정 하나 같이 방대하고 요구 사항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처음에는 단어 뜻을 몰라 참 많이 헤맸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보수적(conservative)이라는 단어에 묶여 며칠씩 진도를 나가지 못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차근차근 번역해나갔습니다.
경력이 쌓이고 후배가 하나둘 늘어가면서 이렇게 만든 자료로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교재를 복사해 쓰곤 했는데, 어느 해인가 아예 책으로 만들었지요. 그때 제법 여러 권 인쇄했을 겁니다. 사내 교육용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당시 같은 사업을 하고 있던 다른 회사로도 꽤 많이 풀려나갔습니다. 언젠가 발주처에서 그 자료를 갖고 있더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우디 근무를 끝으로 은퇴하겠거니 생각했다가 다시 원전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 자료를 찾았습니다. 나름 규정에 정통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그 많은 걸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필요한 걸 찾으려니 원문으로는 세월이 없고. 다행히 본사 서고에 한 권이 남아있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참고용으로 쓰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지난 8월 함께 현장에 부임했던 후배들이 하나씩 본사로 복귀하고 나서 후임으로 온 아주 팔팔한 후배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경험 없는 후배들이니 설명을 해주기는 해야 했는데, 무엇부터 가르쳐야 하나 막연해하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파일을 다시 꺼내 투박하게 편집된 걸 손을 좀 보고 다시 책으로 묶었습니다. (회사 서고에 한 권 남았던 줄로만 알았던 이 책의 파일이 제 컴퓨터에 잘 보관되어 있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자료는 참 꼼꼼히 관리하거든요. 그걸 기억 못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일하고 피곤한 몸으로 퇴근한 두 후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저녁 먹고 잠깐씩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더군요. (물론 그게 진심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두 후배 중 선임인 친구가 이 책을 보더니 그러네요.
“제가 93년생인데요.”
세상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