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한국 교회는 망했다고 한탄하는 이에게 이를 막을 방법은 “교회에서 참 그리스도인 세 명만 찾으면 된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세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열심으로 따지면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벽기도도 그렇고,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데 보내는 시간으로 따져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통성 기도에 큐티에 찬양은 또 얼마나 뜨겁게 하게요. 말끝마다 하나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그런데 그런 열심의 총합이 사회로부터 지탄받다 못해 망해야 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일과로 자리 잡은 성경 쓰기가 지금은 율법서인 신명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객과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세계적인 조류가 되어가는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이 말씀이 여상히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의 가르치심을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문득 그동안 그저 도덕률이라고 치부했던 율법서의 말씀이나 서신서의 여러 권면의 말씀이 어쩌면 그 못지않게 중요한 명령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의 실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말씀은 모두 폐하였다는 생각은 오해였다는 거지요.
많은 기독교인이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애끓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삶은 기도하는 만큼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깊은 기도에 침잠하며 영성을 키워가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기독교 신앙의 궁극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지요. 죽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러니 결국 ‘객과 고아와 과부를 대접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바른 영성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