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일한 지 벌써 일곱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함께 일하는 체코 사람들이 모두 점잖고 친절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간혹 들기는 합니다만, 그게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별사람 다 있구나 하고 웃어넘길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가 이들보다 뒤졌다고 생각하면 그런 여유를 갖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기는 해도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현지 업체 직원 중에 빌런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일하는데, 조금씩 모자란 건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 나가는데, 현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언성이 높아지고 문제가 생기게 만드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가장 멀리하고픈 타입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 대놓고 흉보기는 어려우니 그저 은어 겸, 우스개 겸 NATO라고 부릅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당연히 아닙니다. No Action, Talk Only. 아마 그 친구는 물에 빠져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입은 동동 뜰 테니까 말이지요.
아무래도 현장이다 보니 험한 일, 궂은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땐 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사에서 높은 분이나 오면 얼굴을 비추기는 하는데, 그럴 때면 늘 누군가와 통화 중입니다. 절대로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아요. 일이 잘못되면 사과하고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이 현장에서 다들 그렇게 지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 잘못으로 회사에 적지 않은 손해를 입혀놓고도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답니다. 모두 남의 탓이지요.
오늘,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동료 직원들이 참다못해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저도 이야기를 듣고는 손이 떨릴 정도였습니다. 마음을 조금 진정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동료 하나하나 통화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사무실에 모여 의논하자고 했지요. 동료들이 들어오는 동안 커피 한잔 내려 마시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무섭습니다. 제가 몹시 다혈질이거든요. 그런 줄 아니까 그런 상황이 생기면 결사적으로 참습니다. 그러다 붙들고 있던 끈을 놓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는 거지요. 그 결과가 좋게 끝날 수 있겠습니까. 늘 대가를 크게 치렀습니다. 부끄럽게도 나이 먹고서도 그건 여태 해결 못했네요.
동료들이 들어오고 각자의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제가 없던 일로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은 제가 문제를 터트려야 하는데, 이 현장에서는 제가 마지막 카드이니 그럴 수가 없었거든요. 칼은 칼집에 들어 있어야 무서운 게 아닙니까. 제가 그 칼을 휘두르고 나면, 마지막 카드를 쓰고 나면, 그 뒤는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되도록 원만하게 일을 해결하라.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뒤에 카드가 하나 남아있으니 그거 믿고 그냥 터뜨려라.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겠나.”
제가 해결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뒤에 허깨비라도 뭔가 카드가 하나 남아있으면 해결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럴 때 잘 쓰는 방법이 이사회(board)를 들먹이는 겁니다. 제가 사우디에서 많이 써먹던 방법입니다. 거기선 그게 잘 먹히거든요. 조막만 한 현지법인에 이사회가 가당키나 한 변명이겠습니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회산데, 그래도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나는 이의가 없는데, 이건 이사회 보고 사항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 최대한 설득해 보마” 이러고 빠져나오지요.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빠져나오기만 하면 수습할 시간은 버니까요.
마지막 카드는 ‘마지막까지 들고만 있는 카드’라는 이야기하려다가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살아보니 칼 먼저 빼고 성한 사람이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