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저희 목사님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화두로 글을 올리셨습니다. 우연인지 목사님의 영향인지 몰라도 요 몇 년 그걸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방향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저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가 주제이거든요.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두 해 빠진 일이 있기는 해도 지금까지 주일을 거른 게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교회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해서 이후로 이런저런 일을 맡았습니다. 맡겨주는 일 어느 하나 마다치 않고 참 열심히 감당하려고 애썼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신앙이 자란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사회생활을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쁨이었습니다. 위축된 만큼 신앙이 자란다고 생각한 거지요. 직장인으로 살면서 그 어렵다는 새벽기도를 십 년 넘게 다니기도 했습니다. 봉사면 봉사, 집회면 집회, 영성이면 영성,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래전에 한일장신대 김영민 교수의 글에 무릎을 친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주에 수백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곳에 모여서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어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 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 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겨레21, 1999.04.15.)
이 글을 읽을 당시 무릎은 쳤지만 실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십 년 넘게 한국에서 떠나 살면서 비로소 이 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그때 아무리 일러줘도 못 알아들으니 한국 교회에서 멀리 떼어놓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떠나있으면서 제가 몸담았던 한국 교회와 거기 안주했던 제 민낯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은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김영민 교수 말마따나 제 열정과 에너지가 정화와 연대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갔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런 열정이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고 있지요.
저는 매일 아침 성경 쓰는 걸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때로 그 말씀에서 크게 깨닫는 것도 있고 여러 감사할 조건 때문에 감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일과 하나 마쳤다는 생각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식사할 때 꼭 기도합니다. 남들과 함께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주문처럼 외우는 기도를 왜 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계속합니다. 성경 쓰는 것, 식사기도 하는 것, 모두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인 걸 깨닫고, 또 남들에게 제가 그리스도인인 걸 밝히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제게 성경 쓰는 것과 식사기도 하는 건 선언이자 족쇄인 셈이로군요.
비록 ‘바른 그리스도인’을 화두로 삼고 살고 있지만, 아직도 ‘바른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지요. 그래도 그걸 계속 질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살다 보면 ‘바른 그리스도인’에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목사님께서 연이어 올리시는 글이 제게 큰 지침이요 도전이 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