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바이올린’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밀애>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제목이 Darling Lili인 이 영화는 줄리 앤드루스와 록 허드슨이 출연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이 영화를 봤는데, 그 많은 장면 중에 유독 한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가수이자 독일군의 스파이였던 줄리 앤드루스는 지령에 따라 연합국 조종사 록 허드슨에게 접근합니다. 이런 영화가 그렇듯 둘은 곧 사랑에 빠집니다. 어느 날 아침 줄리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장미에 사랑을 담아 보낸다”는 엽서가 놓여있었습니다. 침실에서 나온 줄리는 거실을 가득 채운 장미를 보고 탄성을 내지릅니다.
바로 제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장면이지요. 더 놔둘 데가 없을 만큼 빽빽하게 장미꽃으로 채운 거실.
유튜브에 가끔 그 영화 클립이 보이기는 하는데, 어느 클립에서도 그 장면이 나오지 않더군요. 결국 DVD를 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장면이 있기는 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장미가 많지를 않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저 방안에 꽃을 좀 풍성히 장식한 정도였지요.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며칠 전에 현장 기술자들이 작성한 암석 시료 목록을 검토하는데 시료가 실험하기에 너무 짧은 게 꽤 많더군요. 다른 검토 내용과 함께 의견서를 쓰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은 게 있을 수는 있는데, 마음에 걸릴 정도로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십 년 해온 일이니 내 기억이 잘못될 수가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제가 잘못 기억한 것이지요.
이번 현장에서 “틀림없는 일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쩍 여러 번 깨닫습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잘 안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런 오류를 부추긴 셈이지요. 저는 제 기억력을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어서 좀처럼 이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정말 난감합니다. 나이 탓이려니 해야지요. 앞으로는 매사를 매번 확인해야 하려나 봅니다.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게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때 이미 “틀림없는 일도 틀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이후로 조심하며 산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글을 쓰느라고 유튜브에서 영화 클립을 또 찾아봤습니다. 줄리 앤드루스 영화를 본 게 세 편인데, 그중 이 영화에서 나온 그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메리 포핀스>의 그는 조금 낯설고,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그는 아주 풋풋했다면, <밀애>에서 그는 아주 우아했거든요. 원숙미라고나 할까.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 하나.
대학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워낙 미팅 복이 없는 사람이어서 파트너 고를 때 사탕을 집었습니다. 사탕이라도 하나 건지자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퀸카를 만난 거지요. 훤칠한 키에, 긴 생머리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까지. 살다 보니 그런 날도 있더라구요. 영화까지 봤으니 애프터는 몇 번 했지 싶습니다.
그런데 뭐가 답답해서 그런 퀸카가 저하고 애프터를 몇 번이나 했을까요? 생각해 보니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