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섭
위즈덤하우스
2018년 5월 18일
‘광장’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아마 87년 6월 항쟁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위야 그전에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규모라던가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이 앞서 있었던 4ㆍ19 혁명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일어난 6ㆍ3 시위와는 차이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주축은 학생이었고, 무엇보다 그것으로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4ㆍ19는 1년 후에 일어난 5ㆍ16으로, 6ㆍ3 시위는 계속된 박정희의 집권으로 변화를 추동하지 못했다.
6월 항쟁이 가져온 변화 중 하나가 그동안 숨죽이고 자신을 탓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회의 크고 작은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말할 권리가 살아났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현장을 전전하느라 집을 떠나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나는 하나 있는 아들에게 그다지 살가운 아비이지 못했는데, 아이가 한창 예쁠 때 아이와 살갑게 지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6월 항쟁이니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하는 건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랬다. 그래서 그 이후에 광장을 통해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내게는 그저 소란스러움으로 비쳤다.
저자는 6월 항쟁이 있기 전까지 한국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해온 가장 오래된 대접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든 게 그들의 잘못이며, 그럴 만해서 그들이 희생당했다고 몰아세우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다행히 민주화 이후 그들에게도 말할 권리가 생겼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그 이후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사회는 이들이 진짜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판별하려 들었고, 진짜 피해자라 할지라도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순한 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피해자들을 핍박하는 논리를 맹신했고, 어떤 이들은 이 피해자들이 불쌍한 척하면서 너무 많은 걸 누리려 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기엔 나도 들어있었던 걸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그들이 대접받을 때가 있기는 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때로는 선동을 위해 사람들은 그들을 단상 위로 불러올렸다. 하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들을 외면하다 못해 바닥에 처박았다. 필요와 관심에 따라 피해자들을 기억했다가 이내 잊어버린 것이다. 이러는 가운데 새로운 피해자는 계속 생겨났고 그들의 억울함 역시 계속 쌓여만 갔다.”
나는 가난하게 자랐고, 빠듯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장년이 되어서야 생계 걱정을 잊고 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딱히 피해자가 되어본 일은 없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건으로 피해자들이 생겨날 때마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탓이고 그럴 만해서 그런 일을 왜 사회가 공감하고 함께 짐을 나눠서 져야 하느냐고 불평하곤 했다. 그나마 나이 들어가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렇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부끄러워할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저자는 억울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프로세스가 대체로 “나는 정의로우며,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정의롭고, 그래서 나는 반드시 내 손으로 정의를 이루고야 말겠고,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도 정의로우므로 이런 내 모든 행동을 이해할 것이다”로 귀결된다고 염려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피해의 다른 유형이라고 말한다.
“억울함은 쉽게 사라지거나 치워둘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특히 힘들고 괴로운 사람의 마음에서 더 쉽게 번성한다. 억울한 사람은 얼마든지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결정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억울함에 사로잡힌 개인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문제는 괴로움보다는 고립이다. 제아무리 정당한 억울함이라고 해도 그것이 크고 깊어질수록 손을 내밀던 사람들은 곁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임에도 더 큰 짐을 져야 한다. 억울함이란 이토록 불공평한 것이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봐도 억울함은 긍정적이지 않다. 억울한 사람들은 논리적인 설득이나 협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이들은 자기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사적인 복수를 시도하거나, 상대방의 절멸 또는 추방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동체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상충하는 이해관계보다도 더 조율하기 어려운 것인 상충하는 억울함이다. 어떤 문제에 억울함이 생기기 시작하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만들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아진다.”
결국 억울함이 되풀이되는 고리를 어디선가 끊지 않으면 억울함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하게 나뉘는 경우라면 해결이 좀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큰 피해일수록 가해자가 불분명한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그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었음에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고,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무고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억울해할 권리가 있고, 자기 억울함을 호소하며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달라고 청원할 권리도 있다. 피해자가 있으면 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피해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피해는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명확한 사실인 데 반해 가해는 개인, 집단, 심지어는 제도나 법 같은 추상적인 데서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악의가 자의가 아니더라도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다.”
피해자에 대한 신원(伸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를 위해 사회가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 세월호에서 미투까지, 어떤 억울함들에 대한 기록>. 두 사건을 소란스러움으로 이해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을 담아서 말이다. 책의 서문에서 앞서 인용한 저자의 글을 읽으며 기대가 어긋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더욱 기대를 키웠다.
그런데 제목에 때문에 읽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글은 육십 편이 넘는 글 중에 서너 편과 서문이 전부였다. 내가 읽으려 했던 범주를 좀 더 넓혀봐도 열 편이 되질 않는다. 제목과 내용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제목이 독자를 기만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찾아보니 저자가 2010년대 중후반에 발표한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그중 몇 편의 공통점을 묶어서 제목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런 책인 줄 알면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목을 붙이는 거야 저자와 출판사의 선택이니 불평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읽고 나서 낚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누구 탓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곧 주제에 관련한 글이 나오겠거니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대를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게 억울할 뿐.
그렇다고 다른 글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나도 때로 칼럼 모음집인 줄 알고 책을 고를 때도 있으니. 독자 중에는 저자의 칼럼에 매료되어 이 책을 찾은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