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민음사
2013년 2월 22일
평전은 좀처럼 엄두를 내게 되지 않는다. 대체로 분량이 엄청난데다가 줄거리가 있는 게 아니니 자칫 지루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고정관념을 멋지게 깬 게 한명기 선생의 <최명길 평전>이었다. 700여 쪽에 가까운 벽돌책을 쉬지 않고 읽었고, 나중에 내용을 설명해야 할 일이 있어 다시 읽기까지 했다. 평전을 읽고 감동하기 쉽지 않은데 <최명길 평전>이 그랬다. 덕분에 평전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읽을 마음을 먹게 된 게 한영우 선생의 <정조 평전>과 <율곡 평전>이었다. 일단 두 권짜리 <정조 평전>은 미뤄두고 낱권으로 된 <율곡 평전>을 읽기로 했다.
<율곡 평전> 1부에서는 그의 삶을, 2부에서는 그의 글을 다루고 있는데, 글 대부분은 자기 이론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정책으로 구현하기 위한 각종 제안서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그것이 최고 정책 결정권자인 임금에게 제출된 상소의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나 내게는 당시 사회와 후대를 향한 제안으로 읽혔다. 분량으로만 보자면 그의 글 대부분은 사상서요 철학서에 치우쳤다. 그러나 행간에 보이는 성별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세가 일생 매진한 주제였던 ‘경장(更張)’에 맞닿아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글은 ‘경장’을 향한 제안서라고 보는 게 무리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이 그토록 애타게 강조한 경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진 왕조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승하면서 연산군 이후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간 잘못된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다. 율곡이 선택한 개혁은 민중을 물리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혁명도 아니고, 수구도 아니며,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일 뿐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율곡의 위대함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긴 눈으로 내다보고 온몸을 던져 고치려고 노력한 선각자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시류에 편승하거나, 현실을 피해 초야에 묻혀 살거나,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길이 있는데, 그는 세 길 중 어는 것도 택하지 않았다. 율곡이 우리에게 남겨 준 교훈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그 하나는 자기 시대에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치열한 정열과 정신이다. 도덕을 바탕으로 한 경장만이 살길이라는 부르짖음이다. 경장은 기성 질서를 큰 테두리 안에서 그대로 지키면서 시의에 맞지 않는 문제를 과감하게 고쳐 민생을 향상하고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매사를 대립과 갈등으로 보지 않고 통합과 절충을 앞세웠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평가는 이렇게 이어진다.
“또 하나는 사물을 대립과 갈등으로 보지 않고 통합과 절충을 존중하는 세계관이다. 그의 이기론은 이와 기를 대립으로 보지 않으며, 인성론 또한 선악에 대한 엄격한 양분론을 거부하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한다. 그 연장선에서 신분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난다.”
율곡의 글 행간에서 읽히는 차별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개인의 성품에 기인한다기보다는 통합과 절충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저 선함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 매진한 그의 삶의 한 단면인 셈이다.
“율곡은 자신의 가정도 서출 두 아들에게 후계를 넘겼으며, 자신의 비복뿐 아니라 모든 비복에 대해서도 함부로 형벌을 가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들의 어미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는 않으나 비첩일 가능성도 있는데, 당시 서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율곡이 양자를 들이지 않고 서자에게 당당하게 후사를 잇게 한 것을 보면 그는 적서 차별의 철폐를 말로만 주장한 게 아니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율곡의 장인인 노경린은 슬하에 3녀를 두고 아들은 없다가 측실의 두 아들에게 균등하게 상속했다. 이는 적서에 차별을 두지 말자는 율곡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한 율곡의 성향은 돌연변이로 형성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자랐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역시 아버지에게서 아들딸 차별 없이 균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율곡은 아버지에게서 큰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였다. 재산이 많지도 않았고, 그 재산도 서모와 비슷한 정도였던 걸 보면 재산은 남녀 차별 없이 균등 상속한 것으로 보인다. 율곡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산도 있었다. 신사임당 집안의 ‘이씨분재기’를 보면 아버지가 다섯 딸에게 균등하게 분배 상속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삶은 오로지 ‘경장’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매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율곡의 경장론은 1569년에 홍문관 교리로서 지어 바친 <동호문답>에서 시작하여 1574년 우부승지로서 올린 <만언봉사>를 거쳐 1575년 40세의 나이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지어 바친 <성학집요>에서 집대성되었다.”
이 모두 분량이 어마어마한데, 그중 무려 1만2천 자에 이르는 <만언봉사>를 지어 바치고 뒤이어 다음 해에 여덟 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 <성학집요>를 지어 바친 것은 <만언봉사>가 실행되지 않은 걸 보고 낙향해 다시 이론을 가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를 ‘경장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선조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율곡이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파주, 해주로 은거한 것은 선조가 율곡의 말을 옳게 받아들이면서도 실천을 게을리하고 개혁을 두려워하여 율곡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 입장에서는 율곡이 비록 충성스럽고 똑똑한 선비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언사가 너무 과격하고 개혁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를 견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며 숨바꼭질하듯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선조는 매우 좋다고 칭찬하고 대신들에게 보이라고 하면서도 사안이 경장과 관계되어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선조는 공인이 조정의 옛 법이므로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율곡은 그것은 옛 법이 나이고 연산군 때 만든 악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쾌도난마처럼 단칼에 해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엔 걸리는 게 너무도 많고, 그런 상황이 선조라고 비껴갈 리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신 간에 아래와 같은 공방이 이루어졌다.
“전하께서는 세상의 일을 유념하고 계시며,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지금까지 정사의 폐단을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하였고, 백성이 받고 있는 고통을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옛 법규만을 굳게 지키고 계시니, 변통할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국가 형세에 대해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끝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십니까? 그 뜻이야 갖고 있지만 어진 신하를 얻지 못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여기십니까?”
“경의 상소를 읽어보고 충성스러움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보고 싶지만 너무도 몽매하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한탄스러울 뿐이다. 율곡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지만, 관리들이나 사대부들이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관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법을 고친다 해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선조의 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조선의 왕이 지도자이기는 했던가? 지도자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 일인가?
평전을 읽으면서 율곡이 가난했다는 뜻밖의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적이 어디 가난한 양반댁 마나님이라고 여겨지는가. 그리고 수없이 벼슬자리를 들고났는데. 하지만 저자는 율곡이 은퇴하여 처가인 해주에 머물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했다고 전한다. 가난한 것도 그렇지만 대장간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여기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했다는 건 더욱 놀랍다. 가히 ‘경장의 사람’이라 할만하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집에 남은 재산이 없어서 장례 비용을 친구들이 조달했고, 가족이 성안에서 셋방살이하는 걸 보고 문생과 옛친구들이 재물을 모아 조그만 집을 사주었다.
“율곡이 35세 되던 해에 선조는 강릉에 있던 율곡을 홍문관 교리로 임명했다. 율곡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라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퇴계는 ‘돌아갈 집과 재산이 없으면 차라리 물러날 계획을 하지 마라. 다만 벼슬을 하도 배운 것을 저버리지 마라.’ 율곡은 그 충고를 받아들여 교리를 맡았다. 실제로 퇴계의 말대로 물러나면 갈 곳이 없었고, 벼슬하면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 현실과의 간극에 회의와 고민을 거듭하면서 진퇴를 반복했다.”
천하에 율곡이 돌아갈 집과 재산이 없어 진퇴를 고민했다니.
읽으면서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저자는 “십만양병설은 인조 때 서인들이 다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과 율곡전서 연보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데 혹시 여기에 저자의 의중이 실린 건 아닌가 싶다. 이어지는 글이 앞의 글과는 달리 확신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율곡은 경연에서 “국세가 떨치지 못한 게 극에 이르러 앞으로 10년이 못 되어 집이 무너지는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미리 10만 명을 양성하되 도성에서 2만 명, 각 도에서 1만 명을 양성하여 노역을 면제해주고 훈련시켜 6개월씩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고, 변란이 일어나면 10만 명을 합쳐서 파수하게 하여 완급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갑자기 변란이 일어났을 때 시민을 몰아다가 싸우게 하는 사태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며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류성룡이 “무사할 때 양병하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놀라운 일이다.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파격 등용하고 “모든 연고와 이해를 초월한 관계를 맺고 합심 협력함으로써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이인데, 외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주장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무산시켰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류성룡은 왜란이 터진 뒤에야 비로소 율곡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니, 혹시 율곡에 대한 미안함이 이순신을 파격 등용하고 흔들림 없이 그를 지지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건 1582년경이었고, 그러고 두 해 뒤인 1584년 사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건 1592년. 무덤 속에서 이 소식을 들은 율곡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후반에 이어지는 율곡의 글은 건성으로 읽었다. 분량으로는 정치사상이나 정치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관심이 덜해 약한 건지, 약해서 관심이 없는 건지. 그래도 언제 한번 차별의 관점에서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 싶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