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오월의봄
2020년 1월 27일
명절 준비를 마치고 형제들이 부부 동반으로 동네 극장엘 갔다. 삼십 년도 더 된 옛날에 동네 극장인데다가 명절 밑이어서 서서 보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한 무리 청년들이 시끌벅적 들어오더니 자기들끼리 마실 걸 던지고 받다가 그만 제수씨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어떻게 맞았는지 금방 눈두덩이가 밤톨만큼 부풀어 올랐다. 당연히 쫓아와 사과할 줄 알았던 청년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혈기가 넘칠 때여서 큰 소리로 그들을 찾았고, 끝내 영화를 세우고 조명을 모두 켜도록 했다. 그러면서 경찰에도 신고했는데, 그들을 찾았을 때쯤 경찰이 도착해 그들과 함께 파출소로 갔다. 당연히 엄벌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으니 끝날 때까지 숨어있다가 빠져나가면 될 줄 알았던 모양인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니 어쩔 줄 몰라 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나도 이 일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는 건 다르지 않았다. 경찰은 상처를 봤으니 이야기로 끝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난감해하는 경찰에게 내가 그랬다. 사과하고 끝낼 일을 이렇게 키운 건 그들이라고. 결국 그들의 사과를 받고 끝내기는 했다.
그때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화가 났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을 다치게 했기 때문인가, 숨어버린 것 때문인가? 그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했으면 과연 그걸로 끝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때 마음도 그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다. 가족이 다치기는 했어도 병원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고, 그들에게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명절 밑이니 모두 조금씩 들떠 있을 때 아닌가. 언짢기는 하지만 싫은 소리 몇 마디하고 끝냈을 것이다.
이것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때 가해자에게 요구하는 게 피해 보상일까 잘못에 대한 사과일까? 아니, 이건 논점이 잘못되었다. 피해 보상이 먼저일까 사과하는 게 먼저일까?
이 일이 형사소송의 대상이라면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의 경중이 피해 보상과 사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가? 판결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이것을 양형에 반영하는 판결에 동의할 수 있을까?
판사로서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을 판결에 적용하기 위해 애쓴 저자는 이에 대해 그것이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며, 모두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재판은 그저 과거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를 판정할 뿐, 그들의 미래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고통과 회복되지 않은 피해, 그리고 깨어진 관계와 파괴된 공동체, 판결의 결과가 무엇인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겨진 이것은 누가 해결해야 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유죄가 선고된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피해금이 반환되는 것이 아니다. 피해금은 별도 민사소송 절차를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만일 민사소송에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주장하면 피의자의 불법 여부가 형사재판 결과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민사재판도 진행이 어렵다. 민사 판결문을 받는다 해도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강제집행 절차를 별도로 거쳐야 한다. 하지만 피의자가 아무 재산이 없다면 강제 집행할 재산이 없으므로 이것도 소용이 없다.”
가해자에게 유죄가 선고된다고 해서, 피해금을 받는다고 해서 피해자의 고통이 회복될까? 저자는 자기가 담당했던 재판의 기억을 떠올리며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어느 아버지가 반복해서 진정서를 냈는데, 진정서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하지도 않았으니 엄하게 처벌해달라고 했다. 진정서를 반복해서 읽어볼수록 피해자의 아버지가 바라는 건 피고인의 진심 어린 사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러면 합의해주고 아니면 안 해주겠다는 식의 단순한 조건문이라거나 피고인이 감형을 위해 합의를 요청하니 피고인을 위해 사과를 조건으로 합의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 일찍 간 딸을 위해서, 그 딸을 잃은 부모와 남은 유족인 자신들을 위해서, 바로 그 행위를 한 당사자로부터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 어린 사죄의 말을 듣는 것,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하는 진심 어린 마음과 그 표현을 듣는 것 자체를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자 유족의 표면적인 의사는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구하고 있으나 피해자 유족이 진짜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것과 그를 통한 위로, 혹은 그런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치유와 회복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법적 정의가 피해자의 회복에 있다면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유죄 선고나 피해 보상에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가해자가 죄의식이 없거나 냉혈한이라면 모를까 자기 잘못으로 누군가 크게 피해를 입었다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저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만나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는 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피해자를 만났을 때 그 억울함이 묻어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사과하려고 해도 변명부터 늘어놓게 되거나 잘못을 인정하는 말보다는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표현이 먼저 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피해자는 듣기 불편할 뿐 아니라 점점 화가 돋우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자칫 준비되지 않은 가해자를 피해자와 성급히 대면시키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고 나아가 피해자에게 2차 가해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또한 피해자가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니 법정까지 오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저자는 여기서 자기가 일원으로 참여한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안내한다. 위에서 예를 든 딸을 잃은 아버지의 경우에 놀랍게도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던 응어리를 모두 털어내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다친 마음을 회복했고, 가해자 역시 마음이 홀가분해졌을 뿐아니라 피해자 아버지의 처벌 불원으로 사법 절차를 일단락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회복적 사법 전문가들이 어느 날을 정해 양쪽 당사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특수한 대화 기술로 이들의 마음을 녹여서 극적으로 사과와 용서를 하고 눈물로 화해하게 만든 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이 피고인 측은 피고인 측대로, 피해자 측은 피해자 측대로, 따로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선 피고인 측을 만나 피고인의 억울한 사정을 충분히 공감해주었습니다. 피고인이 자기 억울함을 비워낸 공간이 생긴 후에 비로소 피해자 입장에서 피고인의 사과가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면서 어떻게 하면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과를 할 수 있는지 고민도 하고 연습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완강한 피해자 가족을 찾아가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랬더니 피고인을 만나 보겠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할 도리밖에 없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에 회복적 사법 전문가들을 만나보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피해자가 진술을 통해 어떤 피해를 보았고, 그 피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 결과가 어떠하고, 그러한 피해가 회복되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고, 자기는 뭘 원하는지에 대해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으로 피해자는 피해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고, 그럼으로써 상처와 고통이 치유된다는 것이다.
“헌법 제27조 제5항은 ‘형사 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할 형사소송법에서는 단지 증인으로서만 신문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증인신문 절차 안에서만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것이어서 피해자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기 어렵다. 그렇기는 해도 피해자에게 보장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권리가 ‘말할 수 있는 권리’라는 건 매우 놀랍다.”
앞서 예를 든 내 경우에도 문제를 일으켰던 청년들이 도망가지 않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였다면,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파출소까지 끌려가는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파출소에서 경찰들이 우리의 진술에 귀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사과받는 선에서 문제를 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대화의 장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의지만으로 될 일이 아니니 전문가가 필요하고, 모든 전문가가 다 앞의 사례처럼 끝없이 인내하면서 기다려주기를 기대하는 게 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대화의 장으로 나온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저자가 설명하듯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본인 마음을 제일 모르는 게 본인이라니 말이다. 그래도 이와 같은 사법적 회복 프로그램이 있다니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물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세상에 어디 원해서 피해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몇 가지만 기억하시라.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 회복적 사법 전문가, 한국비폭력대화센터, 비폭력평화물결, 한국갈등관리조정연구소, 한국평화교육훈련원,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임수희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