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폰 슈타크
갤리온
2010년 11월 1일
나는 지식을 얻는 방편으로 책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읽은 책 대부분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물론 재미로 읽는 책도 없는 건 아니다. 지식을 얻는데 재미도 있으면 당연히 손이 가게 마련이다. 내겐 법률에 관련한 책이 그렇다. 법률 관련 서적을 과연 사회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법률을 다루는 일이라는 게 바로 논리의 집대성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간의 고단한 삶이 들어 있기도 하지 않은가. (법으로 가려야 할 삶이라는 게 고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고, 그래서 나는 평생 법으로 잘잘못을 가를 일 없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단한 삶을 재미로 읽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고단한 삶에 대한 연민 또한 내가 집중하는 주제 중 하나이니 말이다.
오래전부터 제목이 익숙한 책이었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에 이어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제목만으로 같은 저자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책이 변호사인 저자의 데뷔작인데, 3개국 넘는 나라에 판권이 수출되었고 100만 부 넘는 베스트셀러였다는 소개도 관심을 끌 만했다.
나는 이 책이 상황을 펼쳐놓고 거기에서 변호사인 저자가 어떤 관점에서 살인자를 변호하는지, 그게 왜 그래야만 하는 일인지 하나하나 입증해 나갈 거로 짐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저자는 변호사로서 왜 그 살인자를 변호하게 되었는지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하나하나 펼쳐놓을 뿐. 그런데 그 상황을 살피는 것만으로 독자 스스로 살인자를 변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개업의로 마을 사람들에게 평생 칭송받는 삶을 살아온 페너는 끔찍했던 결혼생활 속에서도 신혼여행 때 아내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견딘다. 약속이란 좋을 때만 지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흔두 살 어느 날 더 견디지 못하고 아내를 살해한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기 이름과 주소를 불러주며 살인한 사실을 신고한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이혼을 택하는 게 낫지 않았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혼 또한 아내에게 한 약속을 깨는 일이라 자신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 글 끝에서 저자는 처벌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엇 때문에 형벌을 내리는지, 그를 처벌한다고 정의가 바로 세워지겠는지 묻는다.
엄마가 죽고 무수한 새엄마를 겪어야 했던 남매가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나쁜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남매에게 각각 25만 유로라는 거금의 수표를 끊어 식탁에 올려놓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떠나 살던 남매는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리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거동조차 불편해진 남동생 레온을 위해 누나 테레사는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버려가며 뒷바라지한다. 날이 갈수록 상처는 덧나고 의사들은 그때마다 레온의 신체를 더 잘라내야 했다. 레온이 앞으로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테레사는 레온을 욕실로 데려가 욕조에 물을 받고 어려서 함께 목욕할 때 그랬듯 그를 껴안고 익사하게 만든다. 검사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타클러는 권총을 꺼내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다. 테레사 역시 저자의 의뢰인이었지만,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에서 같은 강의를 듣는 남녀가 섹스를 마치고 함께 누워 애무하는데 남자가 갑자기 사과 깎아 먹던 칼을 들어 여자의 등을 찔렀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여자가 남자를 뿌리치고 기숙사 창문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저자는 사건을 의뢰받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처 사진을 본 순간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저자의 물음에 파트리크는 저자에게 해변에 누워 그녀의 등을 본 순간 깨물어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한 점 베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당신은 미친 게 아니라 그녀를 향한 사랑이 조금 지나쳤던 모양”이라고 말하며 의사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2년 뒤 어느 강연에서 만난 변호사를 통해 파트리크가 식당 여종업원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변호사는 파트리크가 자기에게 저자가 변호를 맡은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살해 동기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변호사는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민사소송에서는 승소를, 형사소송에서는 무죄를 받기 위해 애쓴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의뢰인의 비밀은 어떤 경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되고.
변호사는 위에서 이야기한 앞의 두 사건 같은 경우는 마음에 거리낌 없이 의뢰인을 위해 변호할 것이고, 의뢰인이 무죄 판결받는 것이 오히려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 같은 경우에도 거리낌이 없을까? 거리끼더라도 의뢰인이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비록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변호사의 본문에 걸맞은 일일까?
마지막 이야기의 경우, 저자가 딱히 이렇다 할 생각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행간에서는 자기가 한 변호가 무고한 생명 하나를 죽게 했다는 자책이 읽힌다.
저자는 실제 변호사이고, 어쩌면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모두 자기 경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름도 상황도 바꿔서 의뢰인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는 했겠지만.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야 할 변호사가, 비록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기 사건을 털어놓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다. 이런 사례는 비단 변호사에 국한하지 않는다. 치료 사례로 책을 연이어 발간해서 꽤 유명해진 의사를 보며 같은 의문이 들었던 일이 있다. 물론 그것의 선한 역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선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의뢰인이요 환자의 사례를 공개하는 걸 허용해도 괜찮은 걸까?
처음에 기대했던 거와 달라 중간쯤 덮을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이야기에 빠져서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저자의 표현 방식이 더 적절한 판단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뒤이어 발표한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도 33주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데, 내쳐 읽을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