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본질은 학생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있는 게 아니라 공부 그 자체에 있다. 그러니 대학이 학생을 뽑을 때는 무엇보다 먼저 그 학생이 공부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대학 입시 정책은 이 점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2004.10)
중국산 김치가 수입되면서 국산 김치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김치업체야 사활이 걸린 일이고 정부도 나 몰라라 할 일이 아니니 각계에서 묘안이 백출하고 있다. 결국은 수입을 억제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모양이다. 김치업체들이 대체로 영세하니 정부에서 그들을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줘서 얼마나 버틸 수 있고 언제까지 정부가 도우면 그들이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겠나. 결국은 정부에서 도와준다 해도 업체 스스로가 극복해내지 못하면 목숨을 조금 더 연명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겠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맛을 개발하기 위해 힘쓰고, 합리적인 경영을 통해 원가를 절감하고, 유통과정을 개선해 소비자들이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텐데 대책회의에 참석한 업체들은 한결같이 수입제한만 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김치전쟁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듯해 몹시 염려스럽다. (2005.06)
어려운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점상 하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다소 법을 어긴다고 해도 용납해야 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들이 약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적용하는데 예외를 둔다면 그 또한 차별이 아닐 수 없다. 약자를 돕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들의 편을 드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약자이기 때문에 법을 어기는 것까지 용납하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어쩌면 약자를 배려하라는 주장은 용기 있는 모습으로, 때로는 의협심이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는 그것을 위해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혹시 포퓰리즘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2005.06)
상속세는 상속재산의 절반까지 부과할 수 있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35%인 것을 감안하면 재벌가에서 태어나 단지 부모 잘 만나 얻은 재산을 절반쯤 내놓는 것은 사회 정의로 보아 그리 문제가 없을 듯하기도 하고, 또 그 정도 내놓아도 사는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재벌가에서는 상속세가 그저 세금을 내놓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업이 대형화할수록 창업주 지분이 줄어들어 경영권이 위협을 받는데 상속세로 그나마 지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경영권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외국에서는 상속받은 주식을 매각하는 순간까지 상속세를 유보해주는 조항이 있어서 경영권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더라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조항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속세율이 너무 높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무슨 일이든 자기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민의 시각에서 상속세 50%야 이의를 달 일이 아니지만 기업의 경영권 측면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가능한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그것마저 짐작이 가지 않거든 아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접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2006.04)
정부가 바른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추진과정에서 국민을 기만하는 일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길 수 있나? (2006.10)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이 가격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올렸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어 과징금 1,051억 원을 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과징금은 사상 세 번째로 큰 과징금이라고는 하지만 가격 담합으로 소비자가 입은 피해가 1조5천6백억 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이 아닌가 한다. 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취했다가 적발될 경우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과징금만을 낸다면 누군들 담합에 대한 유혹을 느끼지 않겠나. 물론 담합으로 과징금을 부과 받은 업체로서는 나름대로 주장이 없지 않을 것이고 담합으로 소비자가 입는 피해가 다소 과장되었을 개연성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취했다면 최소한 담합으로 얻은 부당이익은 모두 환수해야 옳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부당한 이득이었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부당이득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어떻게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인가. (2007.02)
양심적 병역 기피자를 구제하기 위한 대체복무 때문에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예상했던 대로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적 병역 기피자를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으며, 그들을 구별하여 대체복무를 허용한다면 누가 병역을 감당하려 들겠나”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복무 시안에 따르면 복무기간도 반 이상 더 길고 복무조건도 군대보다 훨씬 열악하다.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병역을 기피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자유를 억압받고 상당한 고생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일 텐데, 대체복무가 기간이 더 길고 고생이 더 심하다면 누가 대체복무를 선택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복무를 선택하겠다는 건 적어도 그들이 병역을 기피하는 게 자기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해도 군대가 아니라 더 길고 더 고생스러운 대체복무를 선택한다면 (과연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나마는) 그만한 이유가 그에게 있고, 또 그를 존중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물론 그동안 국가에서 시행한 정책을 보면 당초 취지가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이리저리 편법으로 운영되어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하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염려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 제도가 철저하게 지켜지기를 요구하고 그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를 요구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기독교계 일각에서 이 제도가 이단 종파를 공인하는 셈이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이단 종파를 경계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 또한 폭력의 다른 모습일 수 있지 않을까. 양심에 관한 문제는 법이나 제도로 규제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 양심을 따라 사는 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면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사회의 마땅한 의무가 아닐까? (2007.10)
축구선수 몇몇이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병역을 기피했다. 국민으로서 감당해야할 의무를 고의적으로 회피했으니 그에 따른 응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직 기성세대로 편입되기도 전에 기성세대의 편법과 부정을 답습하는 모습은 국가 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일벌백계로 다스려야한다는 것도 얼마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병역기피 자체야 이의를 달 수 없는 분명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몸이 밑천인 축구선수들이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병역을 기피한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축구밖에 없는 그들에게 2년 넘는 공백이란 치명타가 아닐 수 없고 그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이래 망하나 저래 망하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왜 안 들었겠으며, 그런 그들이 이런 길을 택하는 게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겠나. 그렇다고 그들이 저지른 일이 범죄가 아닌 것도 아니고 그냥 이해해주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인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의무를 다 한 사람이 대부분이며 병역의무를 마치고 축구선수로 살아남은 사람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그를 고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많이 나는 도로가 있다면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고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사고가 많이 나니 통행하지 말랄 수는 없지 않은가. (2008.02)
인터넷 실명제가 강화되는데 대해 찬반양론이 비등하다. 익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해악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처럼 익명의 그늘에 숨어 인격적인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횡행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가 한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염려했다. 그럴 염려가 일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신뢰를 받고 있는 방송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다 싶다. 익명으로 글을 쓰는 건 그 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을 여론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그러한 권리를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겠나.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리가 어떻게 자유인가, 방종만도 못한 게 아닌가? (2008.07)
국민연금보다 덜 내고 더 받게 되어 있던 공무원연금을 이번에 손보았다고는 하는데 그 정도가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해 신문마다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 공무원연금이 일반 국민연금보다 수혜의 폭이 큰 것이 당연하다는 기사가 눈에 띠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와 헌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공무원들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공무원 본연의 임무를 다 하고 있나? 공무원이 자기 임무를 감당하는 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와 헌신’이고, 일반 국민이 자기 임무를 감당하는 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와 헌신’이 아닌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가 존립하지 못하면 공무원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일. 도대체 무슨 근거로 국민이 감당하고 있는 몫의 가치가 공무원이 감당하고 있는 몫의 가치만 못하다고 판단을 하는 것일까? 참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008.09)
최근 기획재정부 장관이 종교인에 대한 소득세 과세를 이른 시일 안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늦은 감이 없지 않고, 그동안 수차례 이런 계획이 발표되었음에도 실행되지 않아 과연 이번에는 시행이 되겠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는 않지만, 종교인 또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납세 대상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서 이를 지지한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종교인의 실소득이 면세점 이하인 경우가 70%~80%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지원을 고려한다면 세수 확대에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를 재고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는 납세를 ‘모든 국민이 감당해야 할 의무’라는 조세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세수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모든 국민은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필요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권리를 누리지 못해서도 안 된다. 종교인이라 해도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고 면세점 이하의 저소득자라면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정부에서 종교인 과세를 마무리 지어 이 문제로 종교인들이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2013.03)
중산층이 복지 확대와 증세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의 세제 개편안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데 대해 전문가라는 어느 교수가 ‘정책에는 동의하나 자기가 부담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이중적인 성향’이라고 지적했다. 정말 그럴까?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온 나로서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첫째, 세율이 얼마가 되었든 평생 성실하게 세금을 냈다면 은퇴 이후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세율이 높기로 유명한 독일에서는 소득세율이 40%에 가깝다. 그 나라처럼 노후 생활이 보장된다면 50%라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과세 형평성이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월급쟁이의 담세율이 가장 높다고 확신한다. 개인 사업자, 전문직 종사자, 기업에게는 세원을 제대로 확보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자진 신고한 부분도 필요 경비라는 명목으로 모두 공제해주니 소득이 월급쟁이 몇 배에 달해도 오히려 세액이 월급쟁이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중산층 대부분이 이와 같이 조세정의가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는 한 이런 저항은 커지면 커지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정책에는 동의하나 자기가 부담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이중적인 성향’으로 이해한다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일은 지극히 요원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