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학생들이 이성 친구를 사귈 때 스테플러 침을 선물했었다. 선물치고는 뜬금없어 보여 물어보니 한 통에 침이 보통 5천 개쯤 들었는데, 그만큼 오래 만나자는 뜻이라고 했다. 어제 만년필에 넣던 잉크가 떨어져 새로 사는데 문득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사에 부임하면서 계약서 서명할 때 쓰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면서 꽤 값을 주고 만년필을 샀다. 필기감이 낯설어서 두어 해 밀어두기는 했는데, 그래도 7~8년은 좋이 쓴 것 같다. 만년필 살 때 함께 샀던 잉크를 여태 사용했으니 새로 산 잉크가 떨어지려면 또 몇 년은 걸리겠지. 누군가 오래도록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으면 잉크도 좋은 선물이 되겠다.
내내 검정 잉크를 썼는데 짙푸른색 잉크로 바꿨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나만, 글을 쓸 때 느낌이 새롭기는 하다. 잉크 색을 바꿀까 말까 꽤 망설였는데 바꾸기를 잘했다. 새로운 기운을 얻었으니 그 덕을 좀 기대해 볼까나.
혜인 어멈이 둘째를 낳고 몸조리하는 동안 교우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우리 내외도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고마웠던지. 혜인 아범이 교우들의 배려와 돌봄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니 교회 어른들께서 이구동성으로 그동안 교회를 화목하게 아우르는 역할을 감당해 줘서 고마웠노라, 그러니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며 오히려 격려하시더란다.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겠나. 이제 자식 살아가는 모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은퇴한 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은퇴한 이들의 경험담이 사방에 넘치는데 그렇다고 마땅히 본받을만한 사례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어떻게 하면 본받을만한 삶이 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한 대로 살고, 그걸 책으로 펴내는 걸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 꼼꼼하게 기록하는 건 익숙한 일이고, 기록한 걸 정리하고 다듬는 건 시간만 충분이 쏟아 부으면 가능할 것이니 못할 것도 없겠다. 좋다, 그걸 목표로 삼고 한 번 덤벼들어 보자.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 취지의 선고를 내리자 당장 누구는 양심이 없어서 군대에 갔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는 ‘양심’의 정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을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는데 반해 법률에서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지 않을 권리’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신념의 차이에 따른 병역거부’ 정도로 고쳐서 부르면 오해가 줄어들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신념은 있지만 그것이 늘 같을 수는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예상했던 대로 비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신념의 차이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결정이라는 게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런데 내심으로는 병역이라는 고된 의무를 기피하는 것에 대한 불공평함에 더 무게가 실린 게 아닌가 싶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그러겠다고 할 텐데, 그럴 때 ‘양심적’인지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난 만큼 대체복무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대체로 교정시설에서 군 복무기간의 두 배에 해당되는 36개월 동안 합숙 근무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군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복무조건에서 두 배나 긴 기간 동안 복무하겠다고 한다면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지 않더라도 두 배나 되는 부담을 감당하면서라도 군대에 가지 않겠다면 그것도 존중해줘야 할 개인의 신념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비록 대중의 가치관과 거리가 있다고 해도 그 정도 차이를, 그 정도 다양성을 용납할 수준에 오르지 않았나?
어제 있었던 당정청 회의에서 장하성 정책실장이 모두 발언을 통해 “경제에 대한 근거 없는 위기감이 국민들의 경제심리를 위축시켜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한다”고 했다. 이것이 정부의 현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잘못된 게 없으니 고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선거란 정당에서 정책을 제시하고 그 정책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정당원을 후보로 내세우며, 그 중 하나를 국민이 선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보자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후보자로 대표되는 정당과 그 정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선출된 대통령은 그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같은 정당원이나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늘 중앙일보에 대통령이 대법원, 헌법재판소, 방송통신위원회, 감사원의 수장에 자기 성향의 인사를 앉혔다는 비난조의 기사가 머리기사로 올랐다. 나 역시 이러한 인사정책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지만, 그것은 선거에서 패배한 진영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이런 게 싫으면 선거에서 지지 않도록 잘 했어야 하는 일 아닌가.
문제는 정당이 제대로 된 정책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대통령이 자기 당의 정책이나 이념을 존중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긴 당이 제대로 된 정책이나 이념을 갖추고 있지 못하니 대통령인들 무슨 재주로 당을 존중하겠나. 그러니 정부를 비난하려면 제대로 된 정책을 제시하고 구현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해야지 코드인사를 비난해서야 되겠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의 길을 열어주라는 대법원의 판결은 반드시 필요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현 사회여건을 감안할 때 지금 적용하는데 논란의 소지가 없을 수 없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대체복무를 군 복무기간의 두 배로 하는 것은 징벌적 대체복무를 금하는 세계의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1.5배가 적정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비록 논란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번 판결이 소수자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결정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기는 해도 복무기간을 두 배로 하는 것이 징벌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일부의 주장은 지나친 감이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대체복무가 어느 정도 ‘징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병역이라는 그토록 예민한 의무를 면제받겠다는 이에게 그 정도 징벌을 감수하라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요즘 온라인에 ‘네 글자 무서운 말’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읽어보니 별별 말이 다 많다. 기발한 말도 많고. 그 중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나 좀 봐요.”
내겐 머릿속을 갑자기 하얘지도록 만드는 무서운 말인데, 나 말고도 아내 무서운 사람이 또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요즘은 철이 드는지 그 말 안 들어본지 한참 되었다. 앞으로 안 듣고 살아야 할 건데.
이번 경제장관 인선과 관련해서 청와대에서는 김수현 정책실장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국가의 설계자’이자 ‘현 정부 국정과제 주도적 설계자’이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경제 야전 사령탑’으로 경제정책 집행의 주도권을 행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명으로는 정책집행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선출되지도 않았고 인사청문회조차 거치지 않은 정책실장이 어떻게 한 국가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경제정책을 맡기려면 절차대로 청문회를 거쳐 장관으로 임명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옳지, 청와대라는 벙커 속에 숨어 권한은 권한대로 행사하고 문제가 생기면 애꿎은 장관에게 떠넘기는 행태는 도대체 뭔가?
얼마 전부터 아내와 번갈아 가며 식사기도를 하고 있다. 식구가 모두 모여 식사할 때나 누군가가 대표로 기도하고 아내와 둘이 있을 때는 그저 각자 묵도하고 식사를 해왔다. 처음에는 낯설고 다소 민망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때로 마음이 어지럽거나 속상한 일이라도 생기면 기도를 건너뛰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먼저 그러자고 해놓고 내가 약속을 깰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어쩔 수 없이 기도한 날도 있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가끔씩은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기도하지만, 기도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기도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아내의 기도로 위로받기도 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를 보며 내 문제에 함몰되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 역시 자기중심의 기도에서 조금씩 벗어나 스스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관심을 이웃으로 사회로 확장시키게도 되었다. 그렇게 염려와 낙심을 조금씩 극복해간다. 이래저래 철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조카아이 하나가 그렇게 우리 내외를 따랐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뵈러 주말마다 온 가족이 파주 본가에 모였는데, 그때마다 내 눈길은 막 말문이 트인 조카아이를 따라가기 바빴다. 아직 엄마와 떨어져서 잘 나이도 아닌데 굳이 우리를 따라와서 자고 가기도 했고, 제 집에 데려다 주니 다시 따라 나서겠다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아이가 자라서 이제 모레면 수능시험을 본다. 긴장했을 법도 한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밝았다. 그저 건강하게 시험에 잘 임할 수 있도록, 더도 덜도 말고 지금까지 애쓴 것만큼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아내를 만나 삼십팔 년을 살았다. 식탁에서 아내가 그동안 서로에게 실망하지 않고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게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살아오면서 아내를 실망시킨 일이 왜 없었겠으며, 자식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왜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렇게 여겨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후히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를 구하는데 둘을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뭔가 자꾸 주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내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을지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는, 세상에 일이라고는 마치 그것 하나 뿐인 양 오로지 사랑하는 이가 구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언제든 구하기만 하면 쏟아 붓듯 주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를 구하는데 둘을 주신다는 말씀보다 훨씬 더 따듯하고 감동적이다. 이런 마음이시라면 구하지 않는다고 주지 않으시기야 하겠나. 구하지 않아도 허락하실 것이고, 그건 평생 살아오면서 수없이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마음을 품고 우리만 바라보고 계시니 우리가 구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런데 왜 나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구하지 않고 이것저것 재면서 구할 것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을까. 믿음이 성숙한 게 아니었구나. 후히 주시려는 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로구나.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기사를 읽다가 양심에 따라 일반 국민이 감당해야 할 의무를 거부하는 일이 병역 말고도 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금이 다음 차례가 아닐까 싶은데, 조만간 기독교 목회자들 가운데 양심적 납세거부자들이 나올 수도 있겠다.
비록 교회를 개척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백주년기념교회가 창립으로부터 오늘의 백주년기념교회가 되도록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이재철 목사께서 오늘 예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한다. 은퇴에 대한 광고가 단 한 줄 교회 주보에 실렸다.
“2005년 7월 10일(주일)부터 담임목사로 섬겨온 이재철 목사는 오늘(18일)부로 13년 4개월간의 사역을 마치고 퇴임합니다.”
전체 열한 개 광고 중 여섯 번째로, 그것도 미사여구 하나 없이 은퇴 사실만 알리고 있다. 은퇴예식은 물론 이와 관련한 순서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과연 1988년 직장예배에서 만나 뵌 이래 삼십 년을 스승으로 여겨온 것이 참으로 자랑스러울 만한 모습이다. 오늘 은퇴 광고 하나가 그의 일생의 족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 그보다 큰 문제는 내 말 하느라 바빠서 다른 사람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니 고집이 세어질 수밖에 더 있겠나.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고단한 시간을 보내서인지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감사한 일이기는 한데, 돌이켜보니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었다. 그저 내 말만 쏟아내고 말씀하실 틈을 드리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엔 뭐라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였는데.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도는 의미 없는 일이요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아져도 시원치 않은데 기도에 관한한 최근 몇 달은 오히려 퇴보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시고 나서 뭔가 해보려고 두어 해 꽤나 애쓰셨다. 평생 직장생활 하시던 분이 많지 않은 퇴직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만만하게 찾아졌겠나. 어느 날 친구 한 분이 일산 아파트에 경비로 일하러 나간다고 하셨다. 무슨 대답을 기다리시는지 알면서도 끝내 대답을 드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이 이야기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렇게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아버지는 눈에 띠게 활기를 잃어가셨고, 몇 년 후 쓰러지시고 결국 예순아홉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나서야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하대 받는 모습을 견뎌내실 수 없을 것 같아 선뜻 그러시라고 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시라고 등이라도 떠밀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 그보다는 훨씬 오래, 건강하게 사셨을 텐데.
지금껏 효도는 하지 못했어도 큰 속을 썩여드린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나이를 눈앞에 두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큰 불효였는지 깨닫는다. 깨닫기는 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