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예배 중에 드리는 찬양을 듣는 것은 고단한 삶 중에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자식이니 만나면 반가운 것이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이 드릴 찬양 때문에 마음이 설레는 것도 사실이다. 혜인이네가 여름휴가로 다니러 왔다. 다니러 오면 으레 예배시간에 찬양을 드리곤 해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더니 가기 전에 한 번만 찬양을 드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유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무대에서 오페라 한 편을 연주하는 것이나 예배시간에 찬양 한 곡 드리는 것이 다르지 않단다. 대곡이든 소품이든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찬양 한 곡 드린다고 해서 에너지가 덜 소진되는 것이 아니란다. 모처럼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 싶어서 그러니 이해해줬으면 좋겠단다. 듣고 나니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한 정신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걱정을 접어도 좋겠다.
번지점프를 꼭 해보고 싶다. 뛰어내릴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과연 뛰어내릴 수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뛰어 내릴 용기를 내기는 어려워도 막상 뛰어 내리면 별것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두 번 뛰어내리는 건 일도 아니겠다 싶기도 하다.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렇기는 한데, 과연 죽을병이 걸렸을 때 기도한 대로 무너지지 않을지 궁금한 건 매일반이다. 죽음 역시 겪고 나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한 번 겪고 나면 두 번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데. 어쩌겠나, 죽음은 한 번 뿐인 걸. 맞닥뜨렸을 때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구할 밖에.
나이가 들었다는 건 오래 살았다는 말이니 오래 산만큼 겪은 것도 많고 아는 것도 그만큼 되어야할 텐데, 세월이 흐를수록 분명한 것은 점점 없어지고 사방이 도무지 모르겠는 것뿐이다. 예전엔 그것이 어른들의 겸사겠거니 했는데 그 나이가 되어보니 정말 그렇다. 그런데 그럴 때 어떻게 살라는 말씀은 왜 없을까?
고급을 뜻하는 deluxe 또는 luxury라는 단어의 어원인 luxe는 절제라는 뜻이란다. 이는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아르젠송 백작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귀족들이 절제 없는 인생(vie de luxe)을 사니 나라가 위태롭다고 걱정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급이라는 말의 어원이 ‘절제 없는’이라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그러니 고급스러운 것을 갖고 싶을 때 혹시 자신이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