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늘 심은 것보다 많이 거두고 살았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게으르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손에 쥔 것을 놓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지냈다. 머리로는, 말로는 감사하다고 하면서 삶은 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앞으로 내게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생의 삶이 끝나기 전에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태생이 소심한지라 뭔가 문제가 생기면 풀릴 때까지 거기서 놓여나지 못했다. 문제를 붙들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속만 끓이고 산 시간이 얼마인지 모른다. 내 신세 내가 볶고 산 것이지. 살다보니 때로는 문제를 내팽개쳐두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철이 든 건지 문제에 치여 사는 게 이골이 난 건지, 아무튼 요즘은 생각이 단순해졌다. 복잡한 문제로 일과시간 내내 속을 끓이다가도 퇴근할 때면 그저 하루 일진 사나운 날이었구나 하고 넘길 만큼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대범해진 건가, 아니면 무책임해진 건가? 단순해지니 배짱은 편한데 훗날 이 시간이 후회스럽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나마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 풀릴 때까지 문제를 붙들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풀무에서 수없는 단련을 거쳐야 순금이 되는 것처럼 사람 또한 수없는 고난을 거쳐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굳이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고난은 자초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밀려오는 것이니 말이다. 고난이 찾아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기뻐하기에 앞서 자신이 의에 둔감한 것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합법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불법이라는 것이 워낙 다양하고 방대해서 미처 다 정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내가 도모하고 있는 일이나 시장에 접근하는 방식을 남에게 설명하다 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듯하기는 한데, 정작 지금까지 이룬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쁘다. 뭐가 문제일까? 총론은 있는데 각론이 없는 건가, 아니면 맞닥뜨린 상황보다 생각이 너무 앞서 있는 건 아닌가? 이러다 보면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 꼴이 나지 않을까 겁난다. 사기꾼이 뭐 별 거 있겠나, 결실을 맺으면 불굴의 용사이고 결실이 없으면 사기꾼인 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렸던 적은 없다. 그래서 허락하실 선한 것을 기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선한 것을 이미 수없이 받았고, 힘들기는 해도 지금 상황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한 것이 아니겠나 싶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애썼는데도 결실을 맺지 못해 힘겹기만 한 지금 상황이 어떻게 선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힘겨운 상황이 선한 것이었다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는 모든 순간이 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해놓고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지 않으니 하나님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그칠 뿐,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게 아니더라. 그러다 보니 운전을 할 때도 기도하던 사람이 수만리 먼 길을 떠나면서도 기도하는 것 자체를 잊었다.
발주처 손님들을 한국까지 모시고 와서 환경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행사를 원활하게 진행하려고 일정을 조정하다 보니 발주처들이 합동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통역원 세 사람 중 한두 사람은 없어도 되게 되었다. 효율만 생각하면 그게 정답인데 돌아가야 할 통역원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붙여 굳이 세 사람이 다 있도록 만들었지만, 결국은 주최 측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어코 한 사람을 내일부터 나오지 않게 했다. 이제 막 졸업했을 것 같은 젊은 사람에게 못할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무척 미안하다.
모처럼 서울에 오니 소소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제법 많다. 요즘이야 어지간한 일은 전화로 처리할 수 있어 은행으로 인터넷서점으로 전화를 하는데, 전화상담원들이 하나같이 말이 빠른데다가 그들 특유의 억양까지 어우러지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쓰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더니 이제는 게다가 말조차 알아듣기 어려워 전화를 할 때마다 짜증스럽다. 전화상담원들의 어투며 억양을 표준화하는 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일 텐데,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말을 알아듣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혹시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리는 지는 생각지도 않고 내 할 말만 마구 쏟아내서 그런 건 아닐까?
모든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깨져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오신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오신 것을 믿는다면 화목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것이 당연하고, 화목을 이루기 위해 힘쓰면 주변이 화목하게 변하는 게 당연하다. 과연 내 주변이 화목하게 변해가고 있는가? 아직도 주변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 여기는 건 아닌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된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상식도 도리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방을 할퀴자고 드니 그런 사람과 맞서면 얻는 것은 상처뿐이다.
이웃 하나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할퀴려드는 바람에 수년 째 곤욕을 치르고 있다. 맞서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데도 상대가 워낙 집요하게 할퀴려드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송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남을 할퀴려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수년째 그에게 당하는 고통을 지켜봐왔으니 더 이상 견디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소송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가중될 수도 있으니 그것도 권할 일은 아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해결책인지 궁리를 해보았으나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맞은 주일, 설교의 본문이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물이 동하기만 기다린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이었다. 그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문제란 해결되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때가 이르기까지 38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다. 문득 이웃이 겪고 있는 상황도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설교가 한 주일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깨달았으니 깨달은 바를 전하기는 하겠는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디 그리 쉽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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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
추석은 잘 보내셨습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시겠군요. 따님 결혼식으로 마음이 바쁘시겠네요. 경사를 곁에서 축하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몹시 아쉽습니다. 저희는 내일 리야드로 돌아갑니다.
집사님과 말씀을 나누고 나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내내 생각했습니다. 뾰족한 방법이 없더군요. 잃을 것이 없는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상식도 도리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방을 할퀴자고 드니 그런 사람과 맞서면 얻는 것은 상처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께서 맞서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시는데도 상대가 집요하게 할퀴려 드니 집사님께서 소송을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소송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가중될 수도 있으니 그것도 권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군요.
주일 설교 본문이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물이 동하기만 기다린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문제란 해결되어야 할 때가 있으며, 그때가 이르기까지 38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문득 집사님께서 겪고 있는 상황도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가 한 주일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깨달았으니 깨달은 바를 전하기는 해야겠는데, 고통의 당사자인 집사님께서 받아들이기가 어디 그리 쉽겠나 싶네요.
주일 설교를 듣고, 그것이 우리 질문에 대한 대답이겠다 깨닫고, 그래도 때를 기다리라는 건 너무 막연하고 무성의한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다른 답이 생각나지 않네요. 어쩌면 제가 제삼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도 드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 그래서 집사님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집사님만큼은 아니었지만 저라고 왜 억울한 경우가 없었겠습니까. 그럴 때 그저 견뎠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해결되더군요. 그리고 그 시간이 그렇게 긴 것만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물론 지나고 나서 이야기입니다만.
믿음의 대상이 보이는 것이라면 누구든 믿음을 가지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믿음의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 그것이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는 그 어려운 믿음을 가졌으니 그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 내외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실 수 있도록, 그 과정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실 수 있도록 아내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로마 시민이 관광객을 싫어한단다. 불편하기는 해도 경제에 크게 보탬이 되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한류 바람으로 서울 중심가가 중국 관광객에게 점령되다시피 했다. 명동은 중국어로 뒤덮였고 백화점에서는 중국 관광객에 치어 내국인들이 오히려 푸대접을 받는다. 우리 경제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나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그저 짜증스럽다. 오랜만에 명동을 찾았다가 안하무인에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 관광객들과 마주치며 로마 시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게 관광객이 많아서인가, 아니면 그 관광객이 중국인이어서 그런가?
영화 밀애(Darling Lili)에 나오는 ‘집시 바이올린’을 매우 좋아한다. 곡의 선율도 아름답지만 그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 장면이 너무도 애잔하면서 로맨틱해서 대학 신입생 때 본 이후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에 동영상 검색이 가능해져서 찾아봤는데, 비슷한 장면은 있었지만 정작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한국까지 DVD를 주문하는 요란을 떨고 나서 내 기억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장면을 그렇게 오랫동안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순댓국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돼지고기 자체를 금하는 곳에 살다보니 서울에 올 때마다 기회만 되면 순댓국을 찾는다. 며칠 전 친구들이 가자는 대로 교회 근처에 있는 노포를 찾았다. 어찌나 맛있었는지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국물을 다시 청해 먹었다.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맛을 보겠다고 오늘 혼자 찾았지만 반도 먹기 전에 거기까지 찾아간 걸 후회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맛이 달라졌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러면 그 때는 친구와 함께 해서 그렇게 맛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