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Jan 09. 2021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죽어가는 사람들

데이비드 제럿

김율희 옮김

윌북

2020년 10월


삶을 잘 마무리할 것


하나 있는 자식이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자식의 배필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했던 대로 자식이 신실한 배필을 얻어 가정을 이뤘다. 아직 육십도 되기 전 일이었으니 만혼이 대세가 되어가는 때에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나서부터 삶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에 그치지 않고 환갑을 맞으면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정해놓고 실천하고 있다. 연명치료의향서를 등록했고, 심신의 건강을 위해 정해놓은 운동을 거르지 않는데 때로 아내가 말릴 정도이다. 무엇보다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이 예방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는 하더라만, 그래도 도움이 될까 싶어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글을 쓴다.


삶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순간을 다룬 책이나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더 찾기 어렵다. 그러니 삶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내 생각은 그저 내 생각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좋은 책을 하나 읽었고, 그 책을 쓴 작가가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이 있다고 해서 ‘나는 의사다’를 듣다가 뜻밖에 책을 소개받았다. 평생 노인의학분야에서 일한 의사가 자기가 경험한 죽음의 다양한 형태를 정리한 책이라고 했다. ‘서른세 가지 죽음수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고 해서 저자가 경험한 서른세 가지 사례를 뜻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짐작과는 달리 죽음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쓴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담담히 서술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의 형태, 죽음을 맞는 상황’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기대했던 것과 달라 잠깐 실망했지만, 오히려 의도가 과잉 표출되거나 교훈적이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 평균수명이 82세이지만 건강기대수명은 남성은 65.2세, 여성은 66.7세에 불과하다. 평균적으로 15년 넘게 이런저런 질병을 안고 산다는 말이다. 그러니 옛날에 비해 더 오래 살기는 하지만 건강하게 사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으니 삶의 질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 밭은기침 때문에 약국을 찾은 일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약사께서 마흔이 넘어가면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회복되지 않는 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이니 그냥 친구 삼아 살라고 조언하셨다. 약 먹을 생각을 접고 친구 삼아 사니 그것도 살아지더라. 그래서 나는 저자가 노년에 들면 “살아는 있으나 서서히 죽어간다”고 말한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지적한 대로 건강하지 못한 채로 노년을 보내는 삶이 정말 어떤 것인지 제대로 직면한 적은 없다.


나는 무엇보다 치매가 두렵다. 치매를 생각할 때마다 오래 전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에서 치매 진단을 받은 이순재 선생이 “나는 결코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그런 병에 걸릴 사람이 아니다”라고 토해내던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혹시나 해서 검색했는데 뜻밖에도 단번에 유튜브에서 찾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DHGCZkt3g


“나 나름대로 배운 사람입니다. 돈은 안 부러워도 품위, 자존심, 명예, 나한테는 목숨 같은 것이오. 그런데 그런 내가 정신을 놓을 거라구요? 똥오줌 싸지르고, 아무한테나 욕지거리 하고, 불이나 지르고, 히죽히죽 거리면서 동네방네 헤매고 다닐 거라구요? 그리고 그런 자신을 내가 기억도 못할 거라구요? 그건 지옥이오. 내가 어떻게 그런 흉한, 개만도 못한... 나 치매 아닙니다. 못해요, 그런 거.”


저자는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울지 않았다고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심장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그치면 죽음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우리의 장기는 점진적으로 쇠약해져가고 치매에 걸린 사람은 기억과 통찰력과 감정과 더불어 서서히 죽어간다.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망자란 우리 사이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게 장기보호시설에 있는, 기억에서 지워져간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과연 의미가 있겠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며칠이나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에 이르더라도 그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노인 대부분은 추가로 얻은 날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귀가 멀고 앞이 잘 안보이고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괴롭게 보낼 것이며,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치료할 수 있으면 반드시 치료해야 할까?


저자는 노인이 과잉 진료의 대상이 되기 쉬우며, 그것이 오히려 노인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노인에게는 여러 종류의 질환이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어떤 질환이 다른 질환에 가려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노인은 젊은 사람보다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거나 잘못된 진단에 따른 과잉진단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죽음이 몇 달 남지 않은 사람들, 삶을 의미 있게 연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 품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복잡하고 힘든 치료에 지배당하고 있다. 40세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지료가 80세 환자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40세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치료가 80세 환자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대로 “질병은 무거운 짐이며 치료도 무거운 짐이다. 노인의료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을 새로운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진실일 수 있겠다. 결국 치료할 수 있다고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1990년대만 해도 암이 이미 전이된 노인 환자는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간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평화롭게 죽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라면 CT검사를 받고, 내시경 검사를 하고, 조직검사로 진단을 확정하고, 나이가 그의 절반 정도인 환자도 견뎌내기 힘든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병으로 죽거나 그 과정 중에 걸린 병원 내 감염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엄청난 고생을 했을 텐데, 그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전쟁 때는 환자를 치료하는 우선순위가 평상시와 달라진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위급한 환자부터 살리지만, 전쟁 때는 살릴 수 있는 환자부터 먼저 치료해 전투에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급한 환자는 의료진을 포함한 자원을 더 투입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려서 전투에 내보낼 사람에게 의료 자원을 배분하지 못해 병력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소중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남은 시간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성공할 확률이 없는 수술을 왜 해야 하는지, 한 개인이 평생 지출하는 의료비 중 대부분을 왜 인생의 마지막 여섯 달 동안 써야 하는지, (미국 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번 들어가면 노인환자 중 1/5만 살아나온다는 중환자실을 왜 들어가야 하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진이 연명치료보다는 꼭 필요한 증상관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참으로 타당하다. 물론 이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이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


안락사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캐나다ㆍ스위스ㆍ네덜란드 같은 국가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법령이 있고, 전 세계 1억 명의 사람들이 그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유가 분명한 경우에만 승인되지만, 대중은 일반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며 영국에서는 국민의 80%가 안락사에 찬성한다.


저자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치사량의 마취제를 주입하고 누군가 숨을 멈추며 죽어가는 모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안락사에 간여하지는 않겠지만, 오랫동안 노인 환자들이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아오면서 안락사를 반대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자신을 위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에 찬성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안락사를 결정하는 데 적합한 연령이라는 게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인지능력이 감퇴되어 판단력이 손상되기 훨씬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니 내게 생명을 취할 권리도 버릴 권리도 없다고 배웠고, 또한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괴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그것이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또한 그것이 의료자원을 지극히 비효율적인 곳에 동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내게 국한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들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지고 길을 찾아볼 생각이다.


생전유언장


비록 안락사를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다. 그러니 실정법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내 권리를 행사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생전유언장을 고려할만 하겠다. 이미 연명치료의행서를 등록했지만 조금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 저자처럼 의사로서 처치에 대한 전문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저자가 제안한 생전유언장 중에서 이해할만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렸다. 앞으로 좀 더 궁리해서 이를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 남겨야겠다.


“심장마비나 뇌졸중이 발생하면 중재치료나 수술, 연명용 약물은 원하지 않는다. 음식을 삼킬 수 없으면 정맥주사 또는 다른 방법으로 물과 영양을 공급받기 원하지 않는다. 치료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해주는 정도를 넘지 않기를 바란다. 암이 걸린다면 생명연장보다는 고통경감에 초점을 맞추어 치료하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과학의 품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