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는 6개 노선 176km에 이르는 지하철을 동시에 건설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같은 길이를 건설하는데 20년도 넘게 걸렸는데 이를 한 번에 건설하겠다니 교통 혼잡 때문에 과연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까 싶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교통이 혼잡하기는 했어도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았고 도시도 그런대로 기능을 유지해왔다. 어쩌면 지하철공사로 입은 고통의 총량은 순차적으로 건설했을 때보다 오히려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과적으로 리야드의 결정이 옳았다.
최저임금과 52시간제 때문에 사방이 소란하다.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이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정책으로 고통 받는 기업이나 개인은 그들대로 반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을 관철시키려는 정부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양쪽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이 덜 고통스러울까 생각하다 문득 리야드 지하철이 생각났다. 두 가지 정책 모두 감당하기 힘든 게 사실이니 순차적으로 단계적으로 시행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어지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시간을 끌수록 고통의 총량은 늘어나고 자칫 그러다 주저앉으면 고생만 하고 마는 게 되지나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급하게 서두는 게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정책 당국자의 고민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본디 이만한 그릇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만큼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앙의 힘이었다. 그러니 신앙을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내가 돌아오기 며칠 전부터 밀린 빨래를 한다, 집안을 치운다, 혹시 정리 안 된 데가 없나 챙긴다 부산을 떨었다. 여행은 언제나 고단한 일인데 집에 돌아와 할 일이 눈에 띠면 마음 편히 쉬겠나 싶어서였다. 내친 김에 저녁밥을 짓고 반찬도 작은 그릇에 깔끔하게 옮겨 담아 저녁상을 봐 놓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저녁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내 돌아오면 함께 식사할 생각에 혼자 흐뭇해했다. 젊은 사람들처럼 반가움을 표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나서 밥 먹자고 하니 도착하기 전에 기내에서 간단히 먹었다면서 왜 그때까지 밥을 안 먹었느냐고 뭐라 한다. 머쓱해서 혼자 앉아 우걱우걱 먹었다. 아내가 없는 내내 밥만 지어서 아내가 준비해놓고 간 반찬 꺼내 되는대로 늘어놓고 먹다가 아내 온다고 굳이 구색 맞게 반찬그릇도 챙기고 상도 미리 봐놨는데 말이다.
어제 공항으로 아내를 마중 나갔다가 읽던 책을 잃어버렸다. 카트에 올려놓았다가 짐을 옮겨 실으면서 빼먹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책 구하기가 쉽지도 않고, 게다가 기억할만한 내용이 많아 모서리를 접어가면서 읽던 책이어서 몹시 아까웠다.
문득 붙들어야 할 것은 외면하고 버려야 할 것을 붙들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책이야 다시 사면 되는 일이고, 읽고 나면 그것도 짐일 뿐인데. 어디 그 책 하나 뿐일까. 털어버려야 할 염려, 타인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 익숙해진 일상.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붙들어야 할 것에 매달리자.
사람마다 생긴 게 다른 것처럼 생각이 다른 게 당연한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오면서 정작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여겨오고 있었다.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으니 그를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 아닌가. 돌아보니 이런 이유 저런 까닭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사방에 널렸다.
올해 들어 사람을 사랑하고 내 중심의 삶을 버리겠다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겠다는 기도가 먼저가 되어야하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내 기준에 그의 생각이 옳지 않고 그의 행동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기준이 옳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나와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 무작정 미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보다 이것을 살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밤새 꿈속에서 잃어버린 차를 찾느라 용을 쓰다 이른 새벽에 잠을 깼다. 아내도 돌아가신 장모님이 꿈에 보이시더라고 했다. 마음이 신산스러우니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오지도 않은 내일 일을 염려하느라 정작 두 발 딛고 서있는 오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소용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꿈속에서 잃어버린 차를 찾느라 용쓰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 아니냐.
이유식 먹이기 전에 어멈이 식사기도 노래를 불러주고 혜원이가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대꾸하는 동영상을 몇 번씩 돌려보고 있다. 혜인이 하고 첫 정이 워낙 깊이 들어서 누가 나와도 혜인이보다 더 예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리 사랑이라서 그런지 도무지 혜원이에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아내가 저녁 식탁에서 친구 손녀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혜원이보다도 늦게 태어난 아기가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는데 예후가 그다지 좋지 않아 아내가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괜찮아 보인다더니 그새 상태가 나빠진 모양이다. 식사하면서 혜원이 모습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에 흐뭇했다가 아내 기도하는 걸 보고 마음이 찔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아기 엄마와, 그런 아기 엄마를 지켜보는 그 어미의 아픔을 헤아려주시기를, 그 생명을 지켜주시기를 아내와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청용 선수가 아시안컵 대회가 치러지는 도중에 동생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회 도중 동생 결혼식에 다녀올 생각을 한 이청용 선수도 놀랍고, 그것을 흔쾌히 허락한 벤투 감독은 더욱 놀랍다. 더구나 국가대표 축구감독이, 그것도 국제대회 도중에 가족 역시 축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일정을 허락했다니 놀라움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동안 당연하지 않게 여겨온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체육계의 폭력행위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런 폐해가 그동안 이어져온 성적 우선주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엘리트체육정책 때문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으며, 급기야는 문제가 된 빙상연맹의 해체까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과연 이와 같은 극약처방까지 필요한지, 효과는 있겠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엘리트체육에 치우쳐 있는 체육정책을 손볼 때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면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생각하게 하는 이청용 선수의 사례가 큰 교훈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시기 몹시 힘겨웠던 상사가 한 분 있었다. 사고방식이나 업무처리방식이 독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힘들었다. 발음이 불분명한 것도 아니고 소리가 작은 것도 아닌데 뭘 설명하는 건지, 의도하는 게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하고 말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회사 안에서야 이리저리 꾸려갔지만 외부에서 회의라도 하게 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으려다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 후로 두어 번 시도했고, 어제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결국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다. 분명 우리말인데 문단 하나는 커녕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도 벅찼다. 온라인서점에 올라온 후기를 보니 도무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노라, 차리라 원서를 읽는 게 쉽겠다는 글도 눈에 띤다. 나 역시 원서를 읽는 게 더 쉽겠다고 생각했는데. 누군들 이 번역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다.
번역자가 독일 본 대학에서 신학부 박사과정을 꽤 오래 거쳤다니 내용을 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근본적으로 국어 작문능력이 모자라 보인다. 하긴 앞서 이야기한 상사도 독일에서 공부한 분이니 알아듣지 못할 말, 난삽한 글을 쓰는 건 지적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한 번은 외부 회의에서 궁지에 몰렸다가 그 상사를 내세워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우리를 몰아세우려고 단단히 별렀던 상대 쪽에서 비약과 비논리로 점철된, 중단시키지 않으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상사의 반론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선 것이었다. 그런데 비문으로 점철된 번역서가 그렇게라도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산림녹화에 관한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데 이견이 없다고 한다. 60년대 당시 국제식량농업기구(FAO)의 자금으로 산림녹화를 진행하면서 제일 먼저 탄광을 개발했는데, 이는 연료를 공급하지 않고서는 땔감으로 쓸 나무 베어가는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따라서 산림녹화는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인구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인구감소가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을 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안을 갖추지 않고서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구감소가 ‘정해진 미래’가 된지 오래인데 정부 어느 기관에서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발표되느니 모두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비단 이번 정부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60년도 넘은 옛날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근본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세월이 갈수록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게 아니라 그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려고 하는지, 세월이 가면서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퇴보를 면치 못하고 있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요 며칠 화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예비타당성조사는 편익-비용 비율과 같은 경제성 뿐 아니라 균형발전과 같은 비경제적 요소도 감안하게 되어 있다. 경제성이 떨어져도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는 해도 경제성이 0.8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요소가 아무리 커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고 하니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치지 말자는 주장이 나올 수는 있겠다.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치게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적용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될 일이다. 굳이 절차를 면제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는 못내 아쉽다. 당장 평가방법을 고치는 게 어렵다면 기존의 방법대로 평가를 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행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정무적으로 최종 판단을 내리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책임소재가 분명해지니 부담스럽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 부담도 지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려서야 되겠나. 어쩌면 이 방법이 평가방법을 고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방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