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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22. 2021

[사우디 이야기 29] 종교

사우디 이야기 (29)

사우디는 이슬람의 종주국일 뿐 아니라 국왕의 칭호가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The Custodian of Two Holy Mosque)’라고 할 만큼 종교가 국가체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국가를 운영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의 역할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다지 없어서 신정일치라고 할 수는 없다. 사우디 모든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슬림이고 개종이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무슬림은 살아가면서 5대 의무인 신앙고백, 매일 다섯 번 기도, 금식, 순례, 그리고 자선을 이행해야 한다. 사우디에 산다고 해도 무슬림이 아니니 이를 지킬 의무는 없지만 이것 때문에 영향 받는 것이 적지 않다. 금식월인 라마단과 순례절인 핫지 때는 상당히 오랫동안 모든 업무가 정지되고, 기도시간에는 모든 영업장이 문을 닫는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도 따라야 하는 이슬람 규정도 적지 않다. 모든 여성은 아바야와 히잡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려야 하고, 운전도 불가능하고, 남녀가 합석할 수 없고,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며 음주가무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왕세자 주도로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고, 기도시간에도 문을 여는 영업장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관광객에 한해서’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바야 착용 의무를 면제했지만 ‘관광객이 아닌 여성도’ 아바야를 안 입는 경우가 적지 않고 (아내가 그렇다), 식당이나 카페 같은 영업장에서 남녀합석이 허용되어 이전처럼 남녀 좌석을 분리하는 곳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왕세자 주도로 추진되는 네옴(Neom) 관광특구 때문에 조만간 술과 돼지고기도 허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무성하다. 이 모든 현상은 십여 년 전에 부임할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부임 당시에는 ‘무타와’라고 하는 종교경찰이 있어서 곳곳에서 이 모든 규정을 단속했다. 모든 여성이 아바야 입는 것은 예외가 없지만, 십여 년 전에도 외국 여성이 히잡이나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지 않는 정도는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무타와는 이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내도 언젠가 스카프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타와에게 지적을 받았다. 들고 다니는 막대기로 때리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게 있어서 두말하지 않고 꺼내 썼다고 했다. 1991년 걸프전 때 참전했던 미국 여군이 반팔 셔츠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하던 게 눈에 뜨여 무타와가 체포하려 했는데, 오히려 성추행으로 미군에게 끌려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한다. 무타와의 이런 행동은 과거로부터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그 조치가 단순히 불쾌하거나 불편한 정도에 그치지 않고 큰 희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종교경찰인 무타와는 정부기구인 권선징악청(Commission for the Promotion of Virtue and Prevention of Vice)에 소속되어 있다. 종교경찰은 1979년 메카의 그랜드모스크 습격 사건을 계기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로 무장했으며, 영화나 음악을 금지하고, 악기를 파괴하고, 미용실을 습격하고, 규율을 어긴 사람을 채찍질 하고, 밸런타인데이 같은 서양 풍습을 따르는 것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그러던 중 2002년 메카 여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종교경찰은 여학생들이 아바야를 갖춰 입지 않았고,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았고, 소방관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학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화재 당한 사람들에게 이슬람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피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인데, 그 결과 15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큰 사고로 확대되었다.


1940년 설립된 권선징악청은 모든 국민이 좀 더 바람직한 무슬림이 되도록 조언하고 지도하는 사회의 영적 지침 역할을 해왔으며, 오랫동안 사회 전체가 이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79년 정부가 종교적ㆍ사회적으로 강경 노선을 채택하자 이들이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슬람의 친구에서 사회의 적으로 변질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최근 몇 년 동안 비전 2030에 따라 일련의 개혁을 추진해오고 있다. 비전 2030은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온건한 이슬람으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추진된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가 바로 종교경찰의 통제되지 않은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요한 조치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사우디 정부가 피해왔을 만큼 전례 없고 위험한 결정이었다.


사실 1979년 이전에는 사우디 여성들이 의상과 행동에 불합리한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극단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여성들의 위상이 낮아지고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이 사라졌다. 번창하고 있던 예술 창작활동도 제한되었다. 종교경찰의 폐해가 커지자 2016년 4월 사우디 정부는 종교경찰의 특권을 박탈하는 왕령을 발표했다. 종교경찰은 근무시간에만 단속할 수 있으며 범죄 용의자를 추적ㆍ심문ㆍ신원 확인ㆍ체포ㆍ구금하는 것을 금지했다. 단속이 필요하면 경찰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직접 단속하는 권한을 박탈했다. 그 후로 많이 것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1979년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아무튼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에게 가해졌던 박해는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그 후로 거리에서 무타와를 본 기억이 없다. 무타와는 우선 행색이 남다르고 하나 같이 험악해서 쉽게 구분된다. 험악해 보인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수염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이 일반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위협적인 모습 때문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들은 다른 사우디 사람들과는 달리 머리에 체크무니 스카프인 ‘슈막’만 쓰고 그 위에 이를 고정시키는 ‘이깔’을 두르지 않는다. 모두들 얼굴을 가릴 만큼 수염을 기르고, 전통복장인 ‘도브’도 발목이 드러날 만큼 짧다.



사우디는 이슬람이 국교일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 활동은 불법이다. 부임하던 2009년 당시에도 이미 두바이는 종교단지를 만들어서 이슬람 이외의 다른 종교가 각자의 방식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고, 종교단지 밖에서도 종교 활동을 허용했다. 사우디에 와서 한인교회를 찾아 처음 예배드리던 날, 성경책을 들고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모두 기절할 만큼 놀라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크게 놀랐다. 당시에는 성경책을 들고 밖에 나간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점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부임한 이후로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비록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선교(포교) 활동만 하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고 묵인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는 예배 중인 한인교회에 종교경찰이 급습해서 목사를 포함한 교인들을 모두 체포하고 목사는 끝내 추방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사건을 경험한 교인들에게는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교회마다 종교경찰 급습에 따른 비상대피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다. 또한 통신보안을 위해서 메일에도 교회와 관련된 용어는 사용을 최소화하고, 꼭 필요한 경우 ‘ㄱㅎ’ 또는 ‘ㅁㅅ’와 같이 초성만 적기도 한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무슬림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도 있는데, 신원이 노출될 경우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조차 선교사의 신상이나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는 해도 원유 공급원으로서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처지에 사우디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교탄압국의 오명을 벗어야 할 것이고,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현 국왕 이전에 재임했던 압둘라 국왕은 2007년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면담한 일이 있다. 현 살만 국왕이 즉위한 이래 2017년 11월 레바논 기독교 대주교를 초청했고, 2018년 4월 바티칸 ‘종교간 대화 협의회’ 대표인 장 루이 추기경을 초청했고, 같은 해 11월 왕세자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대표단을 접견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초청은 국왕 명의로 이루어졌지만 정황을 고려할 때 왕세자의 결정인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대표단’ 접견은 바로 전 달에 일어난 카슈끄지 사태로 인한 난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기는 해도 지난겨울에는 그동안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크리스마스 장식이 허용되고 크리스마스 장식용품을 판매하는 상점 사진이 버젓하게 신문에 실렸다. 제방에 뚫린 작은 구멍하나가 제방을 무너뜨리듯, 개방은 작은 틈만 있어도 어느 사회이건 스며들 수 있고 그것이 결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킨 사례가 하나둘이 아니다. 비록 작은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사우디에도 그런 조짐이 하나둘 보인다. 그런 변화가 결국에는 신앙의 자유까지도 허용하는 동력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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