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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17. 2021

[사우디 이야기 28] 문화예술

사우디 이야기 (28)

하나 있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해 아내와 둘이 시간을 보낼 일이 많아지면서 금요일 저녁에는 공연이든 영화든 보고 저녁 먹고 들어오는 게 즐거움이 되었다. 십여 년 가까이 그렇게 살다보니 연주장이나 극장에 꽤 많이 다녔다. 사우디에 부임하고 나서 가장 아쉬웠던 게 도무지 그런 기회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엄격한 남녀분리로 그렇지 않아도 남자들만 가득한 곳에서 지내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거기에 퇴근하고 나서 이야기 나눌 이웃도 없이 사는데다가 어디 문화생활 할 곳이 하나 없으니 이게 사람 사는 곳인가 싶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어찌어찌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매달 연주회가 열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화로 신청하니 연주회 있을 때마다 메일을 보내줘서 덕분에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입장료는 5만 원 남짓 했는데 막간에 간단하게 다과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 놨고 놀랍게도 샴페인도 내어놓았다. 하긴 외교공관은 그 나라 영토로 여긴다니 경찰 단속이 미칠 리 없지만 그래도 뜻밖이었다. 길거리엔 온통 검정 아바야로 둘러싼 여인들뿐인데 알록달록한 옷 입은 여인들을 보니 비로소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양탄자 같은 잔디밭에서 선선한 저녁바람을 맞으며 들었던 금관5중주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만 무스카트에 출장 갔을 때 시내 한복판에 오페라하우스 짓는 것을 본 일이 있다. 2011년 개관한 무스카트 로열오페라하우스는 천 석이 넘는 규모에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로 막을 열었다. 카타르에는 장한나가 지휘하던 카타르 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대우가 워낙 좋아서 유럽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이곳에서 연주활동을 마무리하고 은퇴하기를 꿈꾼다. 아랍미술과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도 열 개가 넘는다. 아부다비 루브르박물관은 이미 문을 열었고, 한창 건설 중인 구겐하임미술관은 내년에 개관한다. 그런데 아랍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사우디에는 오페라하우스는커녕 변변한 공연장도 없고 미술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도 없다.


사우디에서는 회화나 조각을 보기 어렵다. 이는 사람이나 동물을 표현하는 것은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 사람이 이를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음악 역시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이 하람(이슬람 금기)이라고 꾸란(이슬람 경전)이나 하디스(이슬람 예언자의 언행록)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적지 않고, 음악의 경우 국가나 종파에 따라 허용하거나 때로 장려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슬람 수피파의 경우 음악과 율동이 예배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우디에 미술이나 음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회화나 조각 대신 기하학적 무니로 이루어진 그림이나 캘리그라피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젊은이들이 길이 떠나갈듯 아랍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운전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미술관이나 연주장과 같은 문화시설이 없다는 것은 단지 내가 익숙해 있는 서구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문화의 우열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몇 년 전에 한국 문화사절단이 리야드에 있는 킹파드문화센터에서 공연한 일이 있었다. 3천 석이 넘는 대형 공연장이라고 해서 기대를 가지고 찾았다. 중소규모 공연장 몇 개를 함께 갖춘 본격적인 종합공연장이었는데, 규모에 걸맞지 않게 시설이나 좌석도 그렇고 운영 또한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웠다. 위층에서는 무대 앞쪽 반 정도가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울려서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으니 양질의 음향을 기대하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행사나 대중집회라면 모를까 적어도 공연장으로서는 쓸 수 없는 정도였다. 무료행사였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안내도 받지 못했다.


이곳에 영화관이 있다 해도 자막 없이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갈 일도 없었겠지만, 놀랍게도 2019년 제다에 첫 번째 영화관이 문을 열 때까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곳에 영화관이라는 게 아주 없었던 것으로 알았다. 알고 보니 1979년 메카의 그랜드모스크 피랍사건 때 정부가 모든 영화관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많지는 않아도 몇몇 영화관에서 이집트나 인도, 터키 영화를 상영했다고 한다. 다리 하나로 알코바와 맞닿아 있는 바레인에는 예전부터 영화관이 있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우디에 영화관이 생기기 전에도 바레인에 영화 보러 다녔다.


2017년 12월에 사우디 정부에서 2018년부터 영화관을 허용할 것이며 2030년까지 이를 300개 이상으로 늘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2018년 4월에 리야드 킹압둘라금융지구(KAFD) 안에 있는 공연장에서 시범적으로 영화 상영을 시작했고, 지금은 어지간한 쇼핑몰에 영화관이 다 들어섰다. (놀랍게도 KAFD 공연장은 심포니홀로 지어졌단다.) 물론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여러 제한조치가 취해지면서 상영을 중단한 영화관이 아직도 문을 열지 않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도 쇼핑몰에 영화관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신문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VOX Cinema에서 향후 5년 동안 스크린 600개를 열 계획이라고 발표한 일도 있었다.


영화 상영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문화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표출될 것인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릴지 궁금했다. 영화관이 문을 열고나서 두 해 정도 지나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관람객이 적었다. 영화관이 쇼핑몰에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지나다니면서 보게 되는데, 한 번도 영화관 입구가 붐비는 것을 보지 못했다. 리야드에 있는 영화관들은 모두 한국과 마찬가지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이다.


내륙도시보다는 항구도시가 개방적인 경우가 많은데, 사우디도 마찬가지로 내륙 깊은 곳에 있는 리야드보다는 홍해안의 제다나 걸프해안의 알코바가 모든 면에서 더 개방적이다. 십여 년 전에 부임할 때만 해도 음식점에서 여성이 일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 당시에도 제다에는 여성이 카운터에서 돈을 받는 식당이 있었고, 남녀좌석 분리도 리야드만큼 엄격하지 않았다. 알코바에는 슈퍼에 여성 계산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2017년 11월에 그리스 연주자 Yanni의 공연도 제다에서 열렸다. 그 당시 건국 이래 처음으로 ‘남녀혼석 관람’이 이루어졌고, Yanni와 동행한 여성 가수와 연주자들이 남성 관중이 보고 있는 공연에 히잡을 쓰지 않고 연주한 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며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 2019년 1월에 제다 인근에 있는 킹압둘라경제도시(KAEC)에서 Mariah Carey의 공연이 열렸는데, 이것이 여성 가수 공연에 남성 입장이 허용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한다.



그러다 드디어 2019년 7월에 K-pop의 막이 올랐다. 슈퍼주니어가 제다에서 콘서트를 연 것이다. 10월에는 리야드 킹파드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의 콘서트가 이어졌다. 리야드에 있는 스타디움에서 해외 가수가 단독 콘서트를 연 것은 방탄소년단이 처음이라고 했다. 슈퍼주니어의 콘서트는 제다에서 열려서 그 열기를 말로만 전해 듣고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리야드에서 열린 방탄소년단 콘서트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실 나는 방탄소년단이 몇 명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 젊은 여성들은 지금도 한국 사람만 만나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방탄소년단이며 K-pop 이야기를 한다. (십년 전 부임 초기에는 병원에 있는 필리핀 간호사들이 만나기만 하면 한국 드라마며 탤런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한국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방탄소년단 공연을 앞두고 사우디 곳곳에서 젊은 여성들이 리야드로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공연 당일엔 궁금해서 유튜브 중계를 보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앞줄에 앉은 여성들은 아바야를 입지 않았고, 무대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웃옷을 벗어 휘두르기까지 했다. 객석은 온통 춤추는 이들로 가득했다. 스타에 대해 열광하는 모습은 여느 나라와 다를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그것이 사우디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남성은 가뭄에 콩 나듯 몇 명만 보일 뿐 거의 모든 관객이 여성인, 더구나 이렇게 열광하는 모습을 이곳의 기성세대가 보았다면 아마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을 것이다.



사우디는 와하비즘 이슬람국가인 만큼 대중문화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 중 특히 음악에 부정적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슬람에서는 근본적으로 음악을 금기로 여긴다. 대중음악은 물론이고 뉴에이지, 심지어는 서양 고전 클래식 음악까지도 사탄의 음악이라며 모두 배척한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지 않으며, 당연히 음악교사도 없다.


물론 서구계통의 외국인학교에는 음악수업도 있고 음악교사도 있다. 가까이 지내는 교우 중에 성악을 전공한 분이 있는데, 오랫동안 음악교사로 재직해오고 있다. 외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 동아리 활동도 활발한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주말에 필리핀 밴드가 활동하기도 하고 서구인들이 중심이 된 합창단도 있다. 나도 노래하는 걸 좋아하고 함께 성가대 봉사하는 교우 중에 합창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있어 합창단을 한 번 꾸려볼까 생각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아직 그런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신문에 사우디 출신의 가수나 배우에 대한 기사가 부쩍 늘었다. 대부분 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인데 요즘 한두 달 동안에는 사우디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기사가 연속해서 실렸다. 2020년 7월에는 문화부 산하에 문화부장관이 위원장인 음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8월에는 음악예술아카데미를 설립했고, 12월에는 Music International Training Center와 Music Training House 두 기관의 설립을 승인했다. 그 후로 사설 음악교육원 설립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직접 가르치는 교사에 따르면 주로 피아노 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혹 성악을 배우려는 이들도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음악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2018년 여름에 제다에서 이집트 오페라단이 공연한 일도 있었다. 오페라라는 이름이 붙은 공연으로는 처음이어서 눈길이 끌렸다. 정통 오페라는 아니었고 이집트 전통음악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서구 형식의 음악이 연주된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리야드에서도 그런 공연이 공식적으로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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