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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4. 2021

[사우디 이야기 27] 라마단과 핫지

사우디 이야기 (27)

새해를 맞았어도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다. 새해 첫날이 공휴일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는 신년 축하조차 금지할 정도였다. 최근에 드러내고 크리스마스 상품을 파는 곳도 생기고 그런 기사가 신문에 실릴 정도로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신년 인사 건네는 게 낯설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사용하는 헤지라력 신년(무하람 1일)을 축하하는 것도 아니다. 헤지라력으로 해가 바뀌는 건 일부러 챙겨봐야 알 수 있을 만큼 모두들 이에 대해 무심하다. 하지만 이슬람 최대 절기인 라마단과 핫지(순례절)를 헤지라력으로 지키고, 정부에서 발급하는 사업자등록증과 이에 연계되어 있는 각종 인허가는 물론 거주허가증(이까마)도 헤지라력을 기준으로 유효기간이 정해져있으며, 정부 문서도 헤지라력 기준이다.


헤지라력은 서기 622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천도한 때부터 사용해온 것으로,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월력(月曆)이어서 한 해가 그레고리안력보다 11일 짧은 354~355일이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음력(월력)을 사용했지만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는 해의 움직임을 기준(양력)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윤달을 두어 이 차이를 해소했다. 그러나 헤지라력에는 그런 장치가 없어 매년 11일씩 앞당겨진다. 금식월인 라마단은 헤지라력 9월을 뜻하는데, 이와 같이 매년 11일씩 당겨지다 보니 라마단도 매년 그만큼 당겨진다. 부임하던 2009년에는 라마단이 8월 22일에 시작했는데 올해인 2021년에는 4월 13일에 시작한다. 12년 만에 132일이 당겨진 것이다.


그동안 헤지라력을 기준으로 공무원 월급을 지급하던 정부는 2016년 10월부터 그레고리안력을 기준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바꿨다. 세계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당시 시중에서는 11일치 월급을 줄이기 위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우디의 공식적인 휴일은 건국일인 9월 23일, 라마단 끝에 이어지는 이드알피트르 4일, 핫지 끝에 이어지는 이드알아드하 4일 이렇게 9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휴일일 뿐이고 국왕이 명절 때마다 매번 임시공휴일 명령을 내린다. 라마단 때는 2주일, 핫지 때는 1주일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시간이 지나야 정상근무에 복귀한다. 7월과 8월은 더위 때문에 12시부터 3시까지 옥외작업을 금지하는데, 이때쯤이면 관공서에는 직원 대부분이 여름휴가로 자리를 비워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이곳 휴가는 기본이 한 달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라마단과 핫지 사이에 여름이 들어 있어서 라마단 시작한 이후부터 핫지 끝나고 보름 후까지 넉 달 정도 관공서가 아예 개점휴업 상태였다. 그러니 라마단 전까지 매듭짓지 못한 일은 넉 달 후를 기약해야 했다.


처음에는 라마단을 그저 이슬람 금식월로만 알았고 날짜가 되면 시작되는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권위 있는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초승달이 보이는지 관측하고 그 결과를 모아 대법원에서 라마단 시작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그래도 늘 예상했던 날에 라마단이 시작되어서 그저 요식행위로 여겼는데, 어느 해인가는 라마단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던 날에 초승달이 보이지 않아 하루 늦게 시작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라마단 전달인 샤반(헤지라력 8월)에 하루가 늘어나는 것이다.


라마단은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지만 임산부와 노약자, 병중에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은 상황이 허락될 때 지키면 된다. 그것도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려운 이웃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으로 대체해도 된다. 아무튼 라마단이 시작되면 낮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못하고 심지어는 담배도 피우지 못한다. 음식점은 당연히 문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까지 금식해야하는 건 아니다. 호텔에서는 무슬림이 아닌 손님들에게 조식을 제공하기는 하는데, 눈에 띄지 않는 구석방에 최소한의 음식만 차려놓고 서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리 알아서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낮 동안 꼼짝 없이 굶는다. 무슬림이 아니라 해도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요즘은 눈총이나 받고 말지만 얼마 전까지는 처벌 대상이었다.


저녁기도(마그립)는 해가 떨어질 때 시작하는데, 이때 금식이 끝난다. 라마단 동안에는 미리 음식을 차려놓고 저녁기도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들리기만 기다린다. 처음에는 마그립이 시작되면 당연히 기도부터 하고 식사하겠거니 하고 마그립 끝날 때쯤 식당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금식 끝날 때 먹는 첫 끼니를 ‘이프타’라고 하는데, 기관이나 기업에서 자리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이프타’를 제공하기도 하고 이 자리에 거래처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도로에서 운전자들에게 ‘이프타’ 도시락을 나눠주기도 한다.


뜻밖인 것은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진탕 먹고 마시고 즐긴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친척이나 이웃을 초대하고, 가는 곳마다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룬다. 그렇게 밤을 새우니 하루 6시간만 근무하는 데도 그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고 제대로 근무하는 사람을 찾는 건 더욱 어렵다. 이러다 보니 금식월인데도 불구하고 음식물쓰레기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라마단 동안에는 다른 기간보다 쓰레기가 10%쯤 늘어나는데 늘어나는 대부분이 음식물쓰레기이다. 전체 생활쓰레기 중 음식물쓰레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라마단 동안에 음식물쓰레기가 평소보다 30% 정도 늘어나는 셈이다.


그래도 첫 주나 둘째 주까지는 어느 정도 일이 돌아가기는 한다. 셋째 주쯤 들어서면 여기저기가 마비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나는 가능한 사우디 파트너를 만나지 않는다. 담배를 엄청 피우는 사람이다 보니 낮에는 금단현상마저 나타나 감정 기복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나절에는 상점 문을 열지만 오후에 들어서면 시내 전체가 온통 적막강산이 된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지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라, 훤한 대낮에 그 복잡한 도시에 건물마다 문이 닫혀있고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라마단 마지막 주가 되면 국왕이 매번 임시공휴일 명령을 내린다. 물론 국왕의 명령은 공공기관 근무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사기업 역시 이를 따르고, 사기업에서 이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출근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라마단이 끝나면 4일간 이드알피트르라는 축제가 시작된다. 그때쯤이면 상점 곳곳에 특별상품이 산처럼 쌓인다. 블랙프라이데이나 광군제가 아마 이 같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축제 끝날 때쯤 국왕이 금식하느라 고생한 국민에게 다시 한 번 임시공휴일 명령을 내린다. 그러다 보니 라마단이 끝나고도 보름은 지나야 정상근무가 시작된다.


라마단 동안 이처럼 일이 진척되지 않지만, 뜻밖에도 중요한 거래나 결정이 오히려 라마단 때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라마단 때는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있고, 친척이나 이웃 뿐 아니라 거래 상대를 초대해 함께 먹고 마시고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마단 때 한밤중에 불려나간 적도 몇 번 있다. 영어를 쓰는 사람도 이때는 대부분 자기네 말로 이야기를 하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끼어들지도 못한 채 몇 시간씩 장식품처럼 앉아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핫지가 라마단보다 오히려 큰 명절이라고 하는데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긴 연휴 정도로 여겨진다. 다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에 순례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메카의 관문인 제다나 메디나 쪽으로 여행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순례가 취소되다시피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핫지 때 250만 명 정도가 참가했고 사우디 정부에서는 2030년까지 이를 500만 명까지 늘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렇게 많은 순례객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에 항공편 좌석을 얻기도 어렵고 호텔비도 비싸진다. 메디나에서 무슬림이 아닐 경우 성수기 요금의 두 배를 내야하는 경우도 겪었다. 메디나에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예약 가능한 숙소가 메르디앙호텔 하나뿐인데, 몇 년 전 출장 갔을 때 200달러 하던 것을 400달러를 내라고 했다. 물론 그렇게 내지는 않았다. 메디나 시장을 만나러 간 것이라 시청에서 성수기 정상요금을 내도록 조치했다.


사우디에는 핫지부(Ministry of Hajj)가 별도로 있어 여기서 각 이슬람국가에 순례객 쿼터를 할당한다. 핫지부에서는 매년 이슬람국가와 쿼터 협상을 벌이는데, 이슬람국가에서는 매번 자기네 쿼터가 작은 것을 불만스러워 한다.


메카나 메디나 모두 무슬림만 살거나 방문할 수 있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방문하려면 허가를 얻어야 한다. 그동안 업무 때문에 메디나는 수없이 다녀왔고 성지인 선지자의 사원(Prophet's Mosque)도 여러 번 들어가 봤지만 방문허가증을 보자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메카는 입구 검문소에서 허가증을 확인한다고 하고, 이를 어겨서 처벌받았다는 기사도 여러 번 읽었다. 라마단이나 핫지 때는 무슬림이라고 해도 순례 허가증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사우디는 이슬람 신정체제는 아니지만 국왕의 호칭이 ‘이슬람 두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The Custodian of Two Holy Mosque, Mecca and Madinah)’일만큼 매사가 이슬람 중심이다. 이슬람에서는 금요일이 성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금요일ㆍ토요일이 주말이다. 그러나 2009년 부임할 당시는 목요일ㆍ금요일이 주말이었고, 2013년 6월이 되어서야 지금과 같이 금요일ㆍ토요일로 바뀌었다.


주말이 목요일ㆍ금요일일 경우 일주일에 나흘이나 서방세계와 연결되지 않아 경제계 인사들이 이의 변경을 요구해왔고, 그래서 2007년에 내각에서 이 문제가 논의된 일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 되었든 금요일을 성일로 지키는데 문제만 없으면 괜찮은데도 굳이 이를 거부한 것은, 목요일ㆍ금요일이 금요일ㆍ토요일로 밀리면 결국은 토요일ㆍ일요일로 밀릴 수도 있다는 종교계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일이 밀려날 가능성을 내다보고 이슬람국가 중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에 저항한 것이다.


사우디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실권을 쥔 이후로 정신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바뀌고 있다. 여성 인권을 개선하는 여러 조치,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관광비자를 발급하고 이슬람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관광특구까지 건설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주말을 토요일ㆍ일요일로 바꾸는 것이 그 대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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