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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28. 2021

살고 싶어서 더 살리고 싶었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

신승건

위즈덤하우스

2020년 11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않은 심장 때문에 인공판막을 품고 살아야 했던 저자는 고등학교 때 세 번째 심장수술을 앞두고 있던 병실에서 맞은편 의학도서관을 바라보면서 ‘병실에서 의학도서관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의학도서관에서 병실을 바라보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예전 같으면 “환자인 자신을 돌보는 의사를 바라보며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이런 진부한 이야기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에 눈길이 끌리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고 그러면서 고통에 조금씩 민감해져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보다는 그 문제가 주변에 알려지는 걸 두려워한다. 수술할 때 겪었던 고통보다도 자신이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한다는 사실을 더 힘들어한다. 그래서 수술로 가슴에 생긴 흉터를 감추려고 더운 여름에도 헐렁한 옷을 입지 않고 수영장에도 가지 않는다. 그런 그의 피해의식은 고등학교 때 의사의 경고를 무릅쓰고 교내 마라톤에 출전해 완주하면서 극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저자는 바라던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권하는 술잔도 거절하지 않는 만용을 부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만용’은 ‘남과 다른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자기가 치료받던 대학병원 흉부외과로 실습 나간 저자는 거기서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자신이 결코 과거의 자신과 단절될 수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 숨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동안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그늘을 자기 손으로 걷어낸다.


비록 극복은 했으나 그렇게 힘들었던 자기 과거를 이 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이유를 “아픈 이들이 직접 느끼는 고통과 옆에서 짐작하는 것은 실로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주변 사람들이 환자가 겪어야 할 질병의 고통과 치료의 고단함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건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환자들은 질병 그 자체 못지않게, 심지어는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겪어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저자는 전문의 자격을 얻고 병원을 나온다. 그리고 자기가 꿈꾸었던 ‘환자를 바라보는 삶’을 마다하고 공직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박봉의 공무원을 택한 것은 심장수술 병력 때문에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짐을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짐으로 여기는 이들이 저자 말고도 있기는 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공직을 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자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는 없으나 몇몇 구절을 통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의사고시에 합격해 의사가 된 날, 저자의 아버지는 의사 판사 검사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이 그 존재 이유’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말기를 당부한다. 또한 저자가 자기를 평생 치료해 준 담당 교수에게 진료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고 말하자 담당 교수는 앞으로 “열심히 해보라”고 말하는 데, 저자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지나온 과거’를 말하지 않고 “앞으로 열심히 해보라”며 ‘가야할 미래’를 말해준 것은 자기를 환자가 아닌 의사로 인정해준 것이라고 여기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저자는 이런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행간의 의미를 찾아가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병역면제를 혜택이 아닌 짐으로 여기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지 않은가.


저자는 한때 IT 스타트업을 창업해 스마트폰을 활용한 의료 서비스라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지만 그것이 자기가 꿈꾸던 원격진료의 구현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후회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언젠가 자신이 원격진료의 일부를 감당하게 되었을 때 이 회사가 계속 수익을 추구하고 있다면 자신의 진심이 의심받게 되지나 않을지 염려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업을 접는다. 그렇다면 비록 저자가 지금 공직에 머물러 있으나 그의 꿈은 원격진료에 있는 것이고, 잘나가던 사업을 스스로 접을 정도의 사심 없는 자세를 갖췄으니 여러 이견이 충돌하고 있는 예민한 원격진료 체계를 세워나가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만 하겠다.


저자는 ‘신승건의 서재’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살펴보니 서평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도 다방면의 다양한 관심사를 자신만의 색깔로 정리해 올려놓았다. 그 중에 이 책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도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이곳에서 이 책이 잉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로그는 수없이 봤지만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한 독특한 글이 있어서 관심을 끌었다. ‘소장록’이라고 이름 붙인 폴더인데, 이름 그대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과 그 사연을 올려놓았다. ‘소장록’이라는 구성도 독특했지만 그 중 다수가 필기구여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내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가 바로 필기구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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