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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31. 2021

예수와 비폭력 저항

제3의 길

월터윙크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년 08월


기독교인으로 살았으니 폭력에 반대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비폭력이고 비폭력은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했을 뿐 구체적으로 비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아마 단순히 ‘견뎌내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미국의 진보신학자이자 운동가인 저자 월터윙크는 비폭력nonviolence을 ‘무저항주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오해하는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되겠다.


그렇게 오해하다 보니 그동안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권세가 폭력적이더라도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불의나 심지어 폭력조차도 용서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치열하게 고민했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단지 갈등이 일어나지 않기만, 아니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만 바라고 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폭력을 행사하는 체제가 바뀌기를 바랄 뿐 체제를 바꾸는 일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저자는 비폭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선한 일에 전력투구하기보다는 단지 악한 일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폭력이란 ‘평화적인 수단으로 악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 단순히 ‘인내(한글개역)’나 ‘참고 견디는(공동번역ㆍ표준새번역)’ 것이라기보다는 ‘치열한 결의’를 뜻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보면 오히려 비폭력저항nonviolence resistance이란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치지 말라”, “폭력을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라”고 ‘저항하는 수단’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문제는 과연 그 방식이 통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폭력을 폭력 아닌 방법으로 보복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으며, 그러자면 필연적으로 폭력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과연 폭력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 논리는 무엇이며 실제로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불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힘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수단이 너무 자주 불의에 사용된 수단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 원수 역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악마로 생각하고 그들을 ‘절대 악’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들 속에 들어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변화의 가능성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할 수 있고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들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내가 염려했던 문제에 대해 저자는 “예수의 비폭력저항은 현실적인 권세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피해 폭력적 혁명으로 인한 피해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며 실제 사례를 열거한다.


“인도가 비폭력저항으로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3억 명 인구 가운데 8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폭력 투쟁을 통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해방된 알제리는 거의 1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헝가리 무장반란이 소련에 의해 진압되는 과정에서 헝가리인 6천 명이 죽고 4만 명이 투옥되고 고문당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발적 비폭력저항이 일어났을 때는 70명이 죽고 정치범들은 석방되었다. 미국 흑인민권운동에서는 5만 명의 시위대가 투옥되고 살해된 사람은 1백 명을 넘지 않았지만, 쿠바와 니카라과 무장혁명에서는 각각 2만 명이 살해되었고 엘살바도르에서는 군인 사상자를 제외하고도 6만 명이 살해되었다.”


물론 이런 사례는 비폭력이 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춘 정부일 때 가능할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동구권 전체가 비폭력적인 압력에 의해 와해되면서 이런 주장이 힘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최소한의 상황을 전제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는 것을 전제하신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민족 전체가 그런 경우는 더더욱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누구나 그 과거와는 상관없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비폭력으로 폭력을 물리치기 위해 예수의 “다른 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말씀에서 그 방법을 찾는다.


“오른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오른손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 이에게 왼뺨을 돌려댐으로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린다. 말하자면 상대에게 나를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것은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벗게 만든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강자에게 맞서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록 구조적 변화를 꾀하기 어려운 약자라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예수의 명령은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실제적이며 전술적인 조치인 셈이고, 따라서 이것은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맞서라는 명령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방법을 ‘예수 제3의 길’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이의 구체적인 방법을 정리해 권면하고 있다. “도덕적 주도권을 장악하라.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인격과 존엄을 주장하라. 무력이나 조롱에 해학으로 맞서라. 복종을 거부하라. 스스로가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받아들이지 말라. 체제의 불의를 폭로하라. 스스로의 힘을 인정하라.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소용없도록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기준 하나를 제시한다. “불법을 저지른 것에 대한 처벌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것인데, 우리가 애당초 부당한 법을 공정한 법으로 바꾸도록 요구한 것은 우리가 법의 원칙에 따르기 때문이므로 저항하는 방식도 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벗어났다면 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만일 흑인들이 미국의 꿈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바의 원천인 제도를 파괴하고 법을 위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예수 제3의 길’을 단순히 원수를 이기기 위한 테크닉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예수께서 그 원수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놓은 채 원수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수단이 되게 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제3의 길’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하는 필연적인 길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 길을 가야합니다”가 아니라 “당신은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다.


이제 선택은 각자에게 달렸다. 저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이고, 비폭력이야말로 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의 말씀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도출해 내었다. 동시에 그것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합법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강제가 아니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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