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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19. 2021

초급 한국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지혁

민음사

2020년 12월


문학으로서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윤영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부터였을 것이다.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1984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서 읽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매료되어 7년을 거슬러 올라가 1977년 첫 번째 수상작인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1984년 이후로 ‘이상 문학상’은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최일남의 <흐르는 북>,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어졌다. 눈코 뜰 새 없는 초년병 시절이었지만 수상작이 발표되면 출장 다니는 중에도 틈틈이 읽었다. 그러다가 1989년 김채원의 <겨울의 환>이 선정되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소설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의무감으로 그 후로 몇 년 더 읽었다. 그렇게 읽은 작품집은 젊은 날의 기억이 묻어있는 것이어서 몇 년 전까지 내내 책장 한쪽에 꽂아두었다.


생각해보니 문학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두운 기억의 저편>의 긴장감 넘치고 탄탄한 줄거리 때문이었고, 관심이 멀어지게 된 것은 <겨울의 환>이 낯설고 읽기 불편했던 데다가 그 이후의 소설이 대체로 그랬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의식을 흐름을 따라간다는 소설은 내게는 그저 두서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고,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작가가 겪은 에피소드를 늘어놓고 그 관계를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 자체와 멀어졌다. 생각해보니 전혀 읽지 않은 건 아니고 줄거리 위주의 소설을 몇 권 읽기는 했다.


<YG와 JYP의 책걸상>에서 소설 한 편을 소개했다. 쓸데없이 가방 끈이 긴 우등생이 미국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통해 불안정한 신분의 이방인으로서 겪는 당혹감, 난감함, 그리고 내재된 슬픔을 표현했다고 했다. 곳곳에 들어있다는 유머 코드도 몇 개 소개했다. 진행자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읽기를 추천할만한, 기념비적인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마지막 한 문장’을 언급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십 년 넘게 해외근무를 하고 있다. 업무 때문에 외국인을 만나야 했고 때로 출장도 다녔지만, 우리 나이의 평균적인 남자들이 그러하듯 영어를 따로 공부한 일은 없었고, 말하기에 앞서서 문법이 맞는지 살피느라 진땀을 흘려야했던 나로서는 해외근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 나이의 남자라고 따로 영어공부를 하지 말라는 법이 있었겠나만, 눈 뜨면 출근해야 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잠자기 바쁜 세월을 보내면서 그렇게 사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말이 통하는 동료 하나 없는 곳에서 십 년 넘게 보내면서 언어로 인한 압박감 때문에 수없이 자책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했다.


작가는 영어 자체가 아니라 한국어를 영어로 가르치면서 일어나는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니 내가 겪은 압박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남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겪는 언어에 대한 어려움이니 뭔가 공감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미도 있으면서 각각의 에피소드 바닥에 흐르는 작가의 페이소스를 헤아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줄 알았다. 소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니 그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익이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작가는 미국에서 두 번째 대학원을 마치고, 다른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고, 7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방이 하나인 집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로 소설을 시작한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한국어를 가르칠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만 자기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은는이가’의 차이와 같은 숫자 10인데 왜 ‘열 시 십 분’으로 읽느냐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 그렇다.) 그러는 중에 어머니가 입원해 수술을 하고, 풀타임 교원에 한 발 다가가고, 끝내는 풀타임 교원이 무산되면서 귀국하기로 한다.


이런 줄거리에 작가가 가르치면서 겪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변주처럼 들고나면서 소설이 진행되는데, 아쉽게도 내게는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였다. 나는 그 에피소드의 바닥에 깔린 작가의 페이소스를 읽어내지 못했다. 에피소드가 특별히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작가의 의도조차 읽어내지 못한 것이니, 결국 읽기는 했으나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읽어가면서 <책걸상>의 진행자가 여운을 남겨두었던 마지막 한 문장에 기대를 걸었다. 읽기는 했으되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소설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진행자는 이 소설 앞머리에 나오는 헌사 “나의 모국어, 어머니께”와 마지막 문장 “내가 사랑하는 모국어의 단어 하나를 영원히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다고 했다. 진행자는 어떤 면에서 이를 반전으로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반전으로 여겼던가?) 내게는 주인공이 귀국을 결정할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소설을 덮어야 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어를 바라보게 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삶을 한 발짝 거리 둔 채 돌아보도록 한다.” “우리의 언어를 타인의 눈에 비추어 보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마침내는 아릿한 아픔을 남기며 삶과 세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살아남겠다는 욕망’이 새 시대의 지형지물에서 어떤 유머로 표현되는지 이 작품은 기념비적으로 보여 준다.” “냉혹한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럼에도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의 욕망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 대한 소개와 추천의 글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중 어느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문해력이 딸린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생각은 없다. 단지 요즘 문학작품을 읽기에는 내가 너무 구식인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고, 그래서 책을 고를 때 조금 신중해져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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