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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16. 2021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테세우스 배의 역설

김은진

생각의 힘

2021년 1월


‘테세우스 배의 역설’


미술품 복원전문가인 저자는 미술품 복원의 세계를 소개하는 이 책에서 ‘테세우스 배의 역설’을 통해 미술품 복원의 원칙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는 크레테 전쟁에서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아테네 청년들을 구해서 돌아온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용맹함과 승리를 기리기 위해 그들이 타고 온 배를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판자가 하나둘씩 썩어버렸다. 그래서 썩은 것을 떼어내고 새로운 나무판자를 붙이는 일을 반복했다. 어떤 사람들은 배가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닌 새로운 배가 되었다고 말한다.” - 1부 ‘미술품 복원의 원칙’


그리고 저자는 “배의 모든 부분이 다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 묻는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으로 이 책 전체에 걸쳐 모양을 바꿔가며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과출신 독자인 나로서는 복원과학자인 저자가 사례를 들어가며 애써서 설명하고자 했던 복원의 세계, 그 중 특히 구체적인 복원기술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러한 관심을 충족시킬 만큼 내용이 충실했다. 그러나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은 저자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설명한 복원의 세계가 아니라 저자가 ‘테세우스 배의 역설’을 통해 독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저자는 이어서 “새롭게 복원한 숭례문은 언제의 숭례문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과연 복원한 숭례문이 국보의 자격을 유지하는 게 옳은 일인지 회의했던 예전의 내 질문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었고, 중앙청도 역사이고 광화문도 역사인데 굳이 중앙청을 헐어내고 광화문을 복원하는 것이 옳은가 생각했던 내 문제의식으로 확대될 수 있는 주제였다. (이것은 고흐의 ‘들꽃과 장미가 있는 정물’ 작품의 캔버스 바닥에 숨어있는 ‘두 레슬러’를 복원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게 아닐까?)


놀랍게도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자가 인지하고 있는 색은 각자가 색에 대해 갖고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라며 일반적인 통념조차 흔들어놓는다. 말하자면 진리는 없다는 것인데, 이런 서술을 대하면서 저자는 스스로를 보존과학자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자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의 색이란 빛이 물질의 표면에서 일부가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오면서 시신경 세포를 자극해 뇌가 해석한 것이다. 몇 단계의 가변적 요소와 주관적 해석을 거쳐 순식간에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색의 실체이다. 현실에서 완벽한 색맞춤은 존재하지 않는다.” - 2부 ‘핑크 빛으로 보이는 피카소의 청색 그림’


뭉크는 말년에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지붕도 없는 곳에 작품을 그대로 걸어두고 비와 눈을 맞고 때로는 매서운 바람과 먼지를 견딘 흔적을 작품에 남기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렇게 걸어둔 그림은 먼지가 쌓이기도 하고 물감이 떨어지거나 들고 일어나기도 했지만 뭉크는 이 느낌을 좋아했고, 그런 흔적도 작품의 일부로 여겼다고 한다.


저자는 미술품의 복원은 작가의 의견을 반드시 반영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작가의 의도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복원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뭉크의 작품은 어느 상태에서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그 결과 시간이 흘러도 더 이상 시간의 흔적을 담을 수 없게 되었다면 그것이 작가의 의도를 해친 것은 아닐까? 또한 저자가 자문한 대로 작가의 의도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원래의 색’을, 어쩌면 ‘원래의 색이라고 추정되는 색’을 찾아 색이 변해버린 그림 위에 덧칠하는 것을 과연 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저자는 “그림의 현재를 부정하거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역사를 억지로 감추어서는 안 된다”고 자답한다. 말하자면 복원은 그림을 감상하기 적합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쳐야지 완벽하게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나는 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복원의 한계


미술품이 복원되었다고 하면 대개는 원 상태로 돌아가거나 원 상태에 근접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희망사항이라고 못 박는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작품이 손상되기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원 전의 상태는 어땠으며 그것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처리했는지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훗날 다시 작품을 복원해야할 상황이 생겼을 때 혼선을 빚지 않고 좀 더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좀 더 발전된 복원 방법이 나왔을 때 작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원작에 더욱 가깝게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복원하는 일은 구체적인 복원기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왜 복원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복원 목표와 한계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작품의 재질과 유형에 따라 알맞은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현대미술작품은 재질이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작품의 복원을 전문가 한 사람에게 맡기더라도 작품에 포함된 각각의 재료에 관한 전문가에게 적절한 자문을 얻어 최적의 복원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주름이 생기고 유연성이 떨어져 몸이 뻣뻣해지는 것처럼 미술품도 그런 과정을 거쳐 균열이 생긴다. 감상이나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면 이런  균열은 그림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균열을 기필코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작가가 완벽한 표면 상태를 통해 뭔가 표현하려는 것이 있었다면 표면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보이는 것은 작가의 의도에 치명타가 될 수 있으므로 이 경우 무엇보다 표면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저자는 이런 이유 때문에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복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술작품의 보존에 사용하는 모든 재료는 반드시 검증된 것으로 물리적 화학적으로 안정해야 하며, 필요할 때 언제든 작품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에 더 좋은 복원재료나 복원기술이 개발되면 미술작품을 다시 처리할 수도 있는데, 그때 지금 복원해놓은 것이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복원하기 위해 먼저 미술품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데,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비파괴검사 방식으로 분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비파괴검사로 필요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작품의 극히 일부분을 잘라내어 분석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분석에 필요한 시료는 아주 적은 양만 있으면 되지만, 미술품을 복원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미술품을 훼손한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에 필요한 시료는 아주 제한적이고 소량이어야 하는데, 저자는 바크샤리 필사본을 분석하기 위해서 20밀리그램의 작은 조각을 채취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몇 년이 걸렸던 사례를 들어 이러한 방식이 실제로 얼마나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복원전문가이면서도 미술품 복원의 범위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으로 미술품을 복원하는 모든 과정 역시 엄격하고 정확해야 하며 훗날 좀 더 발전된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강조점 모두 미술품을 이해하는 폭이나 방식이, 그리고 미술품 복원 기술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술품은 저자에게 단순히 복원하고 보존할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쏟아야 할 생물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미술 문맹


미술은 내게 교과목의 하나였을 뿐 감상이나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심이 없어서 아는 것이 없는지 아는 것이 없어서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에서나 여행 중에라도 미술관을 찾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예술이 본능적인 것이라면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미술품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박용구 선생이 그의 수필 ‘음악과 인생’에서 피난열차에서 한 젊은 음악도가 틀어놓은 ‘G선상의 아리아’가 끝나자 서양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곡을 한 번 더 들려 달라고 했다는 것처럼.


비록 과학적인 관점에서 미술품복원의 세계를 들여다볼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읽어가면서 미술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알게 된다면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던데 그렇다면 혹시 나 같은 문외한도 조금만 노력하면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오래 전 노르웨이 출장길에 베르겐을 방문했을 때 그곳이 그리그와 페르귄트의 고장인 건 알았지만 뭉크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이 있는 건 몰랐다. 베르겐은 도시가 아름답기도 하고 그곳까지 가는 길도 환상적이어서 언젠가 아내와 가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에 Rasmus Meyer Collection에 들러 뭉크의 작품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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