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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6. 2021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라

바트 어만

이화인 옮김

갈라파고스

2018년 6월


고통에 천착한 이유


사노라면 크고 작은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그 고통을 헤쳐 나가느라 급급해서 깊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아내의 암수술을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고통은 왜 생겨나는 것인지, 고통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과연 고통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수술 전날 밤, 이 고통이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평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수술실로 보낼 수 있었다. 다행히 수술도 잘 끝났고 후유증 없이 오늘날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고통에 대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아내의 고통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더라도 내 생각이 그대로였을까 자문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모든 고통은 인간의 저지른 죄의 결과일 뿐이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며, 하나님이 선을 행하기 위해 고통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일은 더더욱 없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짙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고통이 설명되지도 않았고, 설명이 된다 해도 납득되지 않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소개하는 방송을 듣게 되었다. ‘바트 어만’이라는 신학자가 쓴 책인데, 모태신앙인이었으나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전능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이 세상에 왜 이토록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점차 신앙을 잃어갔고, 그러다 결국은 신앙을 떠났다는 것이다. 신앙을 떠난 신학자라는 것이 상식적이지도 않고 요즘 하도 이단사설이 난무하고 있어 괜히 시간낭비가 되지 않을까 해서 내 성향을 이해하고 계신 목사님께 조언을 구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책이어서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고통이라는 모순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 어느 구절을 가장 의지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늘 망설임 없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라(애 3:33)”는 말씀을 꼽는다. 그 말씀은 내가 가장 의지하는 말씀일 뿐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자칫 우리가 겪는 고통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받도록 놔두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홀로코스트나 캄보디아 대학살이나 보스니아 인종청소 같은 극악한 사건을 허용하시느냐 묻는다. 물론 수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고, 신정론(神正論)에서는 이를 타락한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해 일어난 결과로 여겨서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러한 모순을 도저히 자신의 신앙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결국 신앙을 떠나기에 이른다.


나는 의도적인 악행의 결과로 발생하는 고통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 이를 악용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신정론에 동의한다. 아울러 고통이 모두 악의 결과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하나님이 고통을 내리신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무지나 무능의 결과일 수 있고, 부주의해서 일어나는 실수의 결과일 수 있고, 생태 사이클의 한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것을 모순으로 여기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고통에 대한 성경의 해석


성경은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거나(예언서), 악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거나(예언서), 하나님이 이를 통해 구원을 이룬다거나(요셉ㆍ예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내리는 것이라거나(욥), 하나님이 고통을 내리기는 하지만 우리 같은 미물들에게는 설명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다거나(욥),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문제(전도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성경이 고통의 문제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책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위와 같은 다양한 해석 가운데 자기 입맛에 맞는 구절만 선택해 그것만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또한 성경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이어서 불일치와 모순과 실수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며,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과 상황에 관심이 있었지 수천 년 후에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며 만약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맥락 없이 지금 상황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인가, 죄에 대한 징계인가?


고통에 대한 가장 흔한 해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기 원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으며, 그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든 않든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선택한 자유의지의 결과로 자기가 고통을 당한다면 굳이 하나님을 소환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 무고한 이들이 고통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소환될 수밖에 없다. 고통이 죄에 대한 징계라는 관점은 성경 어느 한 부분에 잠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바탕을 이룬다. 인간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 결과 약자들이 보호받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무고한 사람들이 당하는 극한의 고통을 생각하면 고통이 죄에 대한 징계라는 관점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고통을 겪는 원인은 명백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굶주리고 환난을 겪는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악한 자가 잘되고 의로운 자가 끔찍한 고통을 받는 모습이 너무도 많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왜 더 이상 의인을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의인이 고통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묻는다.


나는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단지 죄의 결과일 뿐이다. 내가 내 죄의 결과로 겪는 고통이 어떻게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으며, 무지나 무능이나 실수의 결과로 겪는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기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통이 죄의 결과이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던 상관없이 타인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선한 것을 허락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사람이 악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꾼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믿는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사용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통을 겪는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고 고통에서 구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고통이 그토록 가혹하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교훈을 주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파괴하고 인간을 굶겨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나 역시 이 해석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하나님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성경의 너무 많은 곳에서 선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고통 때문에 더욱 강해질 수 있고, 고통을 통해 믿음을 확인할 수 있고, 고통을 겪으며 종말을 의식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런 언급이 사람이 행하는 악조차도 선하게 바꿔 사용하신다는 언급보다 분량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평신도에 지나지 않지만 평생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매어 살아온 내 경험에 비춰보면 이 말씀조차 구원을 이루는 도구로, 선을 이루는 도구로 ‘고통까지도’ 사용하신다는 것이지 구원을 이루고 선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통의 유익한 단면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지 유익을 얻기 위해 고통을 내린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늘 유익한 것만도 아니고, 그저 고통에 머무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연현상의 결과


저자는 자연재해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 또한 하나님의 속성이신 사랑하심과 전능하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콜롬비아의 화산폭발, 허리케인 카타리나, 동남아의 쓰나미를 예로 들면서 이런 자연재해를 신약성경에서는 공중권세 잡은 자들의 소행이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어 다행이라며 하나님의 불개입을 에둘러 비판한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데 왜 세상을 섭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실종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은 지구라는 행성이 유지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북미의 깊은 숲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눈이 내려서 스스로 꺼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피해로만 여길 수 없는 것이 그렇게 해야 비로소 생태계가 제대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강이 범람해 많은 피해가 일어나지만, 홍수도 그렇고 홍수가 나면 강이 범람하는 것도 자연의 섭리이다.


쓰나미가 덮치고 산불이 일어나고 홍수로 강이 범람하면 당연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 희생은 사람이 그 생태 사이클 안에 끼어들어갔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으로 보면 희생이지만 전체 지구로 보면 순환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천지를 먼저 만드셨다. 그러니 자연재해로 인해 (그것 역시 인간 중심의 표현이지만)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불가지론(不可知論) 또는 종말론적 해석


혹자는 하나님이 분명 어떤 계획을 갖고 고통을 주는데 우리가 단지 그 뜻을 모르는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 이 모든 고통이 결국 인류를 위한 궁극적 선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이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신약시대에 와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악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쪽으로 무게를 실어 고통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렇게 삶과 관계없는 신앙을 왜 가져야 한다는 것인지 묻는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은 매우 강렬하고 감동적이어서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믿을 경우 사회적 태만과 무책임을 막을 수 없으며 인간의 고통을 덜어줄 우리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으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지적에 동의한다. 동시에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세상의 모든 일을 밝히려 들고, 밝힐 수 없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떠난 저자의 결정이 성급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생 신앙인으로 살아왔고 고통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타인의 죄로 인해서, 또는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앞으로 좀 더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게 노력하려 한다. 하지만 그저 기대로 그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 고통


고통은 자신이나 타인이 의도적으로 행한 악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의도하지 않았으나 무능과 무지 또는 실수의 결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인간의 행위와 무관한) 자연재해로 희생을 당하는 것은 명멸하는 생태 사이클을 이루고 있는 한 존재로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선을 베풀기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도 억지스럽다.


어떤 고통이던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없으니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무고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름의 판단이 없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거기에 대응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비록 저자가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는 나와 다르지만 고통이라는 문제에 천착해온 그가 내린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마음대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사용해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고 무고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붙여야 한다”는 결론은 내 생각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고통 받는 이를 돕는 것만큼 그와 함께 슬픔을 나누는 일도, “그것은 당신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인간이 겪는 고통은 어떤 것이 되었든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하신 하나님은 우리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그를 이겨낼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걸을 힘을 주신다. 그래서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라”는 말씀은 아직도 내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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