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장기기증 서약을 했는데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서약서를 어디 뒀는지도 모르겠고, 아직 유효한지도 알 수가 없던 차에 사전 의료의향서라는 것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놓는 절차라고 했다. 직접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해서 서울 오기만 기다렸다.
어제 아내와 의료보험공단에 가서 사전 의료의향서를 등록했다. 임종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받지 않겠으며, 대신 호스피스센터에 들어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했다. 누군가 자식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떠나기 전에 절차를 마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저 본인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요즘 신청자가 부쩍 늘어서 등록 확인증은 서너 달 후에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임종 때 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단다. 사전 의료의향서를 등록하지 않으면 임종 때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니 큰 짐 하나는 덜었다.
저출산은 생태계의 평형을 이루기 위한 자연의 섭리라는 의견에 매우 공감한다. 그렇다면 저출산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저출산 세대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정책이 맞춰져야 하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국가가 공인한다면,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방편 중 하나라고 인정한다면, 같은 뜻에서 안락사 또한 용납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서울을 다녀오고 나서 시차 적응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데 몸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 잠이 오더라도 늦게까지 버티면 조금은 빨리 적응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되지도 않고 굳이 그래가면서 적응을 하는 것이 옳을까 싶기도 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냥 자연스럽게 적응되도록 맡겨놓고 있다.
자연스러운 게 편한 것이고, 그게 바르게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점점 든다. 굳이 자연이나 생태를 거스르는 게 당장은 유익이 될지 몰라도 결국은 독이 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나. 사는 것,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국가의 정책에 이르기까지. 평생 자연을 개발하는 선봉에 서있었고 그것이 한정된 조건을 극복하는 길이라 자부해왔지만, 돌아보니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고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나 하나 더 신중해진다고 뭐가 달라졌겠나마는.
그렇기는 해도 자연스러움을 지키는 것이 궁극에는 내게 유익할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가능하면 이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졸리면 자고, 몸이 견디지 못하면 주저앉기도 하고, 굳이 약점을 감추려 들지도 말고. 이러다 조만간 신선 되겠다.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은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겠다는 약속이자 일용할 양식을 넘어선 것을 욕심 내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도 늘 일용할 양식 이외의 것 때문에 염려하고 그것을 구하기를 힘썼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하고 버려야 할 욕심을 놓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도 그 고단한 삶이 나를 단련시키시는 손길이라고 착각해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엊저녁 교우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 기업들이 문서에 매우 약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일의 성과를 떠나서 계약조건을 따지고 그에 걸맞게 사업을 챙겨나가는 데 아주 서툴러 외국 발주처의 부당한 요구를 바로잡거나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을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라는 것이다. 계약조건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채 그간 해오던 방식대로 공사를 진행해 재시공을 하거나 공사비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늘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을 대하며 사는 농경사회에서는 신용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약속을 굳이 문서로 남기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늘 떠돌아다니는 유목사회에서는 상대의 신용을 평가할 방법도 없고 그러다 보니 뭐든 문서로 남겨놓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단일민족이라는 특징이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오히려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청와대 조직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임기동안 국정을 운영하라고 대통령을 뽑았으니 그가 자신을 보좌할 조직을 만드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걸맞도록 인사청문회는 거치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오고 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면서 비로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교인이 목사에게 목사답기를 요구하려면 스스로에게도 교인다운지 물어야하는 게 아닐까?
정부에서 발주하는 대형 사업은 대체로 기술평가를 거치는데, 수주에 뛰어든 업체는 평가위원이 누군지 알아내는데 목숨을 건다. 힘깨나 있는 업체에서는 우호적인 사람을 평가위원에 넣으려고 로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불공정 요소를 없애기 위해 발주처에서는 평가 당일 새벽에 평가단 풀 중에서 추첨으로 평가위원을 선정하기도 한다. 평가위원이 누군지에 따라 결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느 자치기관에서 첨예하게 맞선 사안을 평가하는데 평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평가위원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기관장의 의도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평가기준도 항목별 평가결과도 공개하지 않았다. 공정? 지나던 개가 웃겠다.
혜인네가 교회에서 교우들의 화목을 아우르는 가정이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지금까지 칭찬받는 그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와 사위 쿠슈너가 국정에 뛰어들어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 사우디에서는 쿠슈너를 큰 동아줄로 여기고 있고, 한국 방문에서는 한미 여성역량강화회의가 열려 여성 장관, 여성 기업인이 앞 다투어 참여해 이방카를 대접했다.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검증절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가족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는데. 우리라면 ‘국정농단’으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일이고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일인데, 어떻게 미국에서는 이를 용납하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