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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22. 2021

고통의 문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C. S. 루이스

이종태 옮김

홍성사

2019년 10월


1.


우리는 살면서 누구라 할 것 없이 수많은 고통을 겪는다. 누구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고, 누구는 그 고통을 극복할 뿐 아니라 자기 성숙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고통으로 주저앉는 사람은 고통이 당연히 고통스럽다. 고통을 자기 성숙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지 묻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저자는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후 하나씩 답을 찾아간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거나,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는 아닌가?”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을 확신하는데 어떻게 그것과 고통을 모순되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체스게임에서 상대에게 수를 물려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게임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이고, 번번이 수를 물려준다면 게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매번 그 전능함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세상이 스스로 운행하도록 만드셨다. 그러니 자연질서는 세상이 스스로 운행하기 위한 조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벗어나려는 인간에게는 자연질서가 제약조건이 되기도 하는데, 인간은 이러한 제약을 고통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을 없애달라는 것은 자연질서를 없애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을 베풀기 즐겨하신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우리와 다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함은 단순히 친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허물을 용서할 수 있고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 허물을 없애주겠다는 결심을 접지는 않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 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본성상 지금 우리의 흠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전보다 좀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불순한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해 주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고통이 인간이 타락해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를 자기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려드리는 것, 즉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의지를 악용한 결과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는 일도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저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악용한 결과를 감내하고, 그 지유의지를 다시 악용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행복해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말인가? 그런 말은 아닐 것인데, 내 역량이 그 이상을 읽어내지 못했다.


2.


오랜 시간 고통스럽다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볼 시간이 많았다. 저자가 이 책의 서두에 정리해놓은 질문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수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러는 가운데 단지 나를 힘겹게 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고통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모든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고통은 무엇이며 어디까지를 고통으로 여겨야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통은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굶는 것은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굶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어쩔 수 없이 굶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굶어놓고 그로 인한 고통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운동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자기를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일이 육체적으로는 고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훈련이라고 하지 고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런 것은 고통의 범주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도 말한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타락해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얻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한다. ‘죄의 결과’냐 ‘죄에 대한 징계’냐 따지는 것은 자칫 말장난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징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저자는 고통이 자연질서에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악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혹독한 도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려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것조차도 선하게 사용하셔서 우리를 돌이키게 만드신다고 믿는다. 결국 죄의 결과로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질서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돌이키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면 이 고통은 오히려 은혜가 될 것이니 이 역시 고통의 범주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자연재해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질서의 하나이거나 그 자연질서를 훼손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고통의 범주에서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자유의지를 악용한 것이든 자연질서를 훼손한 것이든 그것이 내 행동의 결과라면 고통의 범주에서 배제하거나 최소한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대답을 찾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와 무관하게 일어났을 때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저자가 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고 어딘가 그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을 텐데 내가 찾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대답을 읽어낼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분발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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