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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18. 2021

기억 안아주기

소확혐(小確嫌)

최연호

글항아리

2020년 12월


소확혐(小確嫌)


의학방송에서 “아이들의 고통은 진짜 질병이 아니고 그 아이의 과거 경험과 기억에서 비롯된 게 생각보다 많은데, 그런 경우 대부분이 가족이나 의사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설명을 들었다. 물론 가족이나 의사가 일부러 그랬기야 했겠나. 관심을 가지고 도와준다는 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되고 나쁜 기억이 되고 두려움으로 남은 것이겠지. 그 전문가는 아이가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여러 증상을 호소한 것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치료하려 들기 때문에 증상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증상을 악화시킨다고 했다. 아울러 어른들이 이렇게 하는 것 역시 나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그는 그것을 ‘소확혐(小確嫌)’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두 손녀는 그런 증상이 없어 당장은 참고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 어리니 앞으로 도움이 될까 해서 열심히 들었다. 아쉽게도 방송 시간이 짧아서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해 최근에 그가 펴냈다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자 현재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장인 최연호 교수의 <기억 안아주기>이다.


저자는 방송에서 학교에서 복통을 자주 느끼는 학생의 사례를 들어 ‘소확혐’을 설명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성필이는 복통과 설사가 잦고 체중도 늘지 않는다. 위와 대장 내시경 검사결과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복통은 계속되었다. 성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복통이 시작되었고,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복통이 악화되는데, 특히 아침에 심했다.”


“성필이는 수업시간에 배가 아팠지만 대변을 참다가 바지에 싸버렸는데, 이때 당한 창피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꼭 아침에 화장실에 들어가 변을 보고 학교에 가려는 버릇이 생겼다. 그 바람에 나오지 않는 변을 보려다가 화장실에서 30분이 흐르고 결국 지각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아파지고 화장실 갈 생각부터 난다. 아침밥을 먹으면 학교에 가서 변의를 느낄까봐 두려워 거르기가 다반사이다. 특이하게도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성필이는 질병에 의한 복통이 있었던 게 아니라 두려움이 장애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처방이 필요 없어진 것은 알겠는데 방송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끝맺었다는 설명은 없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의사항을 당부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치료’를 마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첫째, 질병이 없으니 복통을 미리 걱정하거나 회피하려고 들지 말라. 둘째,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니 환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셋째, 복통을 계속 호소해도 좋다. 아프고 괴로운 느낌일 뿐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넷째, 재미있게 놀 때나 잠을 잘 때 증상이 사라지는 걸 보면 별 것 아니니 도망가지 말고 부딪치면 이겨낼 수 있다.”


말하자면 ‘소확혐’으로 인해 일어난 증상은 ‘소확혐’을 제거하는 것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는 의사가 주변에 많았다면 왜 저자가 말하는 그런 사례가 많이 발견되는 것일까. 의사가 그에 무지했거나 그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응이 먹혀들지 않은 것일 텐데, 결국 현 의료체계 아래에서는 저자와 같은 의사를 만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아닐까.


손실기피 원인인 ‘소확혐’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의 ‘소확혐’으로 작용하는 나쁜 기억은 대체로 어른들의 나쁜 기억 때문이다. 저자는 태생적으로 잘 먹지 않는 아이를 치료하려는 부모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아이의 몸도 상대적으로 작고 잘 안자라는 것 같아 부모는 걱정한다. 취학 전 영유아 검진을 받아보니 아이의 키나 몸무게가 하위 3% 이하로 떨어져 있다며 큰 병원으로 가서 검진해 보라고 권유한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잘 안 먹어서 그런 것이니 잘 먹이라는 얘기만 해준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부모 중에 누군가 어려서 잘 안 먹었기 때문에 크지 못했다는 나쁜 기억이 있어서 내 자식만큼은 나를 닮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아이에게 음식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도 그것이 성장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 음식을 주지 않고,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이에게 강권한다.”


여기서 부모의 실수는 단순하다. ‘현재주의’가 심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가 못 클 것 같지만, 사실 입 짧은 아이들은 사춘기를 넘어서면서 식성이 달라지고 먹는 패턴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의 부모에게 어려서 파나 양파를 먹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지만 지금은 잘 먹는다. 어려서 작았던 부모 중에 현재는 체격이 매우 좋은 분들이 많은데, 언제부터 잘 먹고 살이 찌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모두 사춘기를 넘어서면서라고 대답한다.


저자가 아이의 미래를 심하게 걱정하는 부모에게 내린 처방은 믿음이다. 아이를 믿고 그 아이의 미래를 믿으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먹는 결정권을 돌려주는 순간 아이도 행복해지고 부모도 행복해진다. 내 아이만 특별하지는 않다. 저자는 이럴 때 부모에게 아이를 믿고 과감하게 부딪쳐보기를 권한다. 아이에게 부모가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을 것 같지만, 몇 끼를 굶고도 잘 놀던 아이는 결국 배가 고파 부모에게 와서 밥을 달라고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밥을 찾는 아이를 크게 칭찬해야 한다고도 알려준다. 아이는 지금까지 밥 먹는 것을 늘 강요받아 식사 시간이 행복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밥 먹는 것이 즐거운 경험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원병


저자는 이런 ‘소확혐’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 행동편향(action bias)과 결합할 경우 없던 병도 만들어 낸다고 지적하며 이를 ‘의원병’이라고 질타한다. 그리고 감기 치료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감기는 원래 바이러스 질환이어서 특별한 치료약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은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로 소량만 복용하고 수분과 영양을 섭취하면 된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지나치게 센 처방을 내린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의사가 아이를 진찰해보니 폐렴은 아니다. 아이는 코감기 목감기에 걸렸고 대증치료면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엄마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약을 세게 써서 폐렴을 예방해달라고 한다. 의사는 폐렴을 예방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중에 엄마에게서 들을 원망 때문에 필요 이상의 처방을 내린다. 엄마와 의사의 걱정이 합쳐진 결과이다. 항생제와 스테로이드가 들어간 처방전을 낸 의사와 받아든 엄마는 만족한다.”


저자는 본질적으로 이 걱정은 ‘손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치료를 받아 아이는 아이대로 고생하고 의료자원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아이가 그 항생제를 자주 먹고 자라나 정말로 중요한 감염이 닥쳤을 때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겨 쓸 약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 엄마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설령 생각을 바꿨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전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 엄마가 의사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으며, 그저 센 처방을 피해달란다고 그런 처방에 익숙해 있는 의사가 처방을 바꾸기를 기대하는 건 또 쉬운 일이겠는가. 또한 의사로서도 행동편향을 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겠나.


심리학으로서의 ‘소확혐’


‘소확혐’은 작지만 확실한 나쁜 기억, 혹은 작지만 확실히 싫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쁜 기억이나 두려움은 재앙이나 엄청난 사태를 겪은 뒤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는 다르다. 하지만 큰일에만 충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사소했던 과거의 나쁜 기억, 즉 ‘소확혐’을 다시 겪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저런 예방책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 예방책이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자라게 마련인데 혹시라도 자기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까봐 그 두려움을 피하려고 애꿎은 아이에게 섭식을 강요하고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한다.


방송을 듣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며느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자책은 가족이 나눠볼 수 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 가면서 그 생각을 접었다. 나는 임상 사례가 주가 되고 그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의학과 심리학 이론을 설명하는 도구로 간간히 임상 사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문적인 서술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에 앞서 읽었던 ‘행동경제학’ 책에서 심리학 이론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다 읽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대충 건너뛰었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아이 둘 키우느라 정신없는 며느리에게 읽으라고 권하기는 너무 부담스럽겠다. 대신 이 서평을 보내줄까 한다.


다행히 두 아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잘 자란다. 두 돌을 넘긴 작은 아이는 이제 막 변을 가릴 때가 되었다. 큰 아이도 잘 키웠으니 작은 아이도 잘 키우겠지만, 혹시나 참고가 될까 싶어 아이가 변 가릴 때 겪는 혼란에 대한 임상 사례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려한다.


“아이는 늘 기저귀에 변을 봐왔다. 변을 보는 곳은 언제나 기저귀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저귀가 사라지면 아이가 ‘기저귀를 떼는 시기이니 이제부터 변기에 변을 보아야 하는구나’ 생각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는 그저 변 볼 곳이 사라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변을 보지 못하고 참게 된다. 변을 참기 시작하면 변이 딱딱해지고, 항문 통증을 반복적으로 느끼고, 그 나쁜 기억 때문에 배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면서 변비가 생긴다. 이럴 경우 변기 훈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 아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기저귀를 돌려주어야 한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친구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변기 훈련을 해나간다. 아이가 늦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의 정상 행동발달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변기훈련을 세 살에 마치건 네 살에 마치건 아이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아이들 대부분은 5세 이전에 변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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