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by 박인식

판단력 (2019.08.01)


며칠 전에 나와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해 친구들이 내 독단을 염려하며 하나씩 자신을 버려가기를 권면하는 댓글을 달았다. 감사한 일이다.


그 글은 내 독단을 자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사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글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나와 다른 의견을 접하면 내 의견과 그 의견 중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지 쉽게 판단했다. 물론 모든 걸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상대가 나보다 그 문제를 더 잘 알 수 있는지 정도는 큰 어려움 없이 판단할 수 있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고 상대가 나보다 그 문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내 주장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 사고방식 덕분에 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삶의 연륜이 쌓여 간다는 것이다. 나이 드는 것만큼 판단력이 나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판단력은 예전에 비해 퇴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염려스럽다.



대통령의 말 (2019.08.02)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킨 것 때문에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에 상응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틀린 곳이 없다. 그런데 국정에 대한 최후 의사결정권자가 굳이 할 발언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퇴로를 차단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발언이 우리의 다짐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여지를 없앤 것이니 그로 인한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안다고 하지 않나. 나는 우리 대통령이 똑똑하기 보다는 지혜로웠으면 좋겠다.



한문성경 (2019.08.03)


오래 전, 교회 장로님 서예 전시회에 가서 ‘我擧目向山 我之扶助 何自而來(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로 시작하는 시편 121편을 넋 놓고 바라본 이후로 상당히 오랫동안 한문성경을 얻으려 애썼다. 당시 영인본이 있기는 했는데 비싸서 엄두를 낼 수 없었고, 그 이후로 혹시 발간된 것이 없을까 찾아봤지만 서울을 떠날 때까지 얻을 수 없었다.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해보니 ‘1912년 발간된 한문성경’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에 발간된 것이 있었다. 당장 주문을 넣었다. 휴가 다녀 올 때 대체로 수하물 여유가 없어 짐을 부탁하는 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다음 주에 돌아올 교우 한 분께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렸다. 이십 년 넘게 찾았던 것이니 욕심이 앞섰다.


내친 김에 창세기 1장과 2장 한문 텍스트를 받아 출력해놓고 ‘太初上帝創造天地’로 시작하는 1장을 쓰기 시작했다. 모처럼 먹을 갈고 육백 여 자가 넘는 글을 쓰느라 오후 한나절이 지나갔다. 한문을 쓴다고 해봐야 먹 가는 시간까지 두 시간을 넘겨본 일이 없는데, 네 시간 가까이 쓰다 보니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중간에 그만둘 생각이 들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책을 주문하면서 은퇴하고 나서 한문성경 전체를 한 번 쓸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언감생심이겠다. 성경 별로 몇 장씩 골라서 써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싶다.



싸움 (2019.08.04)


싸움을 걸어오면 싸우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도 있고 아예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살피자고 하면 무릎 꿇자는 말이냐고 비난한다. 개인은 그럴 수 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과를 자기가 감당하면 된다. 하지만 자기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신중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기왕 벌어진 싸움이니 이겨야 한다.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상처는 남는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지만, 희생되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니 이기기 위해 힘쓰는 것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인을 잘 살피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정부의 지혜로운 대응을 기대한다.



페절 (2019.08.04)


수십 년 만에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닿은 후배 하나가 있다. 얼마나 반갑던지. 지난 번 휴가 때 만나 막걸리 잔을 나누며 예의 쾌활한 그 모습을 마음껏 즐기고 왔다. 그는 자타공인 빨갱이인데, 그것조차도 그를 만난 유쾌함을 덜어내지 못했다. 그 반가운 후배를 글 하나로 오늘 페절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자기가 쓴 글은 아니었고 어디서 퍼 나른 글이었다. 한국의 경제력과 북한의 군사력을 합치면 일본 정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얼른 금강산도 열고 개성공단도 열어야 한다고 했다. 몇 자 댓글을 달았다가 바로 지웠다. 그저 의미 없이 진만 뺄 것 같았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만나 서로가 그렇게 반가워했던 그와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 가게 되면 언제고 만나 막걸리 잔을 나눌 좋은 벗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결국 좋은 벗을 잃지 않으려고 친구를 끊었다는 말이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TPO (2019.08.06)


복식예절의 하나로 TPO가 언급되기도 한다. 시기(time)와 장소(place)와 상황(occasion)에 맞춰 옷을 입으라는 것인데, 말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겠다. 꼭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시기와 장소와 상황이 맞지 않으면 눈총받기 십상이니 말이다. 이 말은 어쩌면 시기와 장소와 상황이 맞지 않으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말라는 데 더 무게가 실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해도 세상이 덜 소란스러울 텐데.



반일 불매운동 (2019.08.11)


반일 불매운동을 반아베 불매운동으로 전환하자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제안이다.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나누어 대응함으로서 적의 힘을 분산시키고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자는 전략적인 판단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이 운동으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양국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실제로 반일 불매운동을 어떻게 반아베를 불매운동으로 전환할 것인지, 전환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지 잘 모르겠다.



번복 (2019.08.14)


여럿이 모여 결정을 내릴 때 가능한 모든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결정이라는 게 온전할 수도 없고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내린 결정도 바꿀 수 있다. 이 말은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게 드러나거나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결정을 따라야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정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상황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결정을 무시로 번복하는 사람과 일하는 건 몹시 고단한 일이다. 더구나 그게 잘못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과 일하는 건 허탈하기까지 하다.


평생 설계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런지 결정이 번복되는 일에 유독 민감하다. 설계란 앞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바탕으로 하나씩 쌓아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앞선 결정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바뀌어야 할 것이 바뀌지 않으면 같은 일을 몇 번씩 되풀이해야 하고, 그것마저 놓치면 나중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설계변경 내역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니 결정을 번복하는 일에 그처럼 신중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가 결정을 번복했을 때 그로 인해 누군가 불편을 겪거나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정도는 살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이기 때문이다.



본능 (2019.08.17)


오래 전, 쇠퇴해가는 주력 시장을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업종에 뛰어 들었다. 이미 상당수 업체가 발을 들여놓은 상태라 우리가 설 자리는 없었다. 맨손으로 고군분투하는 중에 부정한 거래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옳지 않은 일이고 고민도 했지만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공식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니 편법으로 비용을 마련했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적으로 융통을 하기도 했다.


매 순간 지혜와 상황을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하면서도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그 일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했다. 단번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사업이 하루 이틀 늦어졌다. 우리 말고도 다른 업체에게 같은 거래를 제안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사정이 급해지자 급기야는 그 부정한 거래를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몹시 덥던 어느 날 결국 그 일이 틀어지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낙담이 되어야 할 일이었다. 벌여놓은 것을 수습 할 생각에 걱정이 앞서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순간동안 이후에 어떤 상황이 생길지 판단할 겨를은 없었고, 다만 옳지 않은 일은 궁극적으로 내게 화가 될 것인 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한 방법으로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한동안 부서의 주력 사업이 되었고, 아직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관용 (2019.08.18)


낮아짐이란 높은 곳에 있을 수 있는데도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니 낮음과 다르고, 겸손이란 누릴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니 가진 것이 없어 누리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그러니 낮은 곳에 있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낮아짐이나 겸손을 운운하는 건 같잖은 일이 아닐 수 없고, 같은 까닭으로 낮아짐이나 겸손이라는 말을 지금껏 입에 담아본 기억이 없다. 관용이라는 말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네 의견을 다른 것으로 여기겠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관용을 말하는 사람 치고 자기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어 놓으니 별 어깃장을 다 놓는다.



부끄러움 (2019.08.21)


나도 책임지지 못할 말을 숱하게 하고 산다. 그렇다고 말과 삶이 다르다고 비난 받는 게 유쾌할 리 없으니 이런저런 핑계도 대고 변명도 한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안다.



도덕, 그리고 부끄러움 (2019.08.23)


도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편법 뒤에 숨은 탐욕을 준엄하게 꾸짖던 그가 걸어온 길이 저잣거리의 장삼이사나 다를 것 없는 얼룩으로 드러나자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만나듯 사방에서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기는 하다만, 그게 어디 너나 내가 정의로워서이겠느냐. 그가 누린 것이 부럽고 그만큼 자식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억울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그나 나나 얼룩진 삶을 살아온 건 매일반이니 이제 그만 이쯤에서 멈추자. 나라가 온통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데까지 떨어질 수야 없는 일 아니냐. 그는 내려오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 부끄러운 과오를 힘써 지워야하지 않겠느냐.



도덕성 (2019.08.24)


법무장관 임명과 관련한 이번 사태는 도덕성으로 집권한 세력의 대표주자가 그가 비난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도 온전치 못한 인간이니 그럴 수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스스로 온전치 못한 존재임을 깨달아 지난날에 그 도덕성을 잣대로 비난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용기를 보여준다면 그를 지지할 수도 있겠다.



감사 (2019.08.26)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며 감사할 조건을 찾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게 생명이 남아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인데도 말이다.



광란 (2019.08.26)


법무장관 후보자를 향한 언론의 의혹 제기를 광란이라고 한다. 광란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비난하던 사람들을 향한 의혹 제기는 괜찮았던 것일까? 의혹의 내용을 보면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하는 비난은 정의이고 네가 하는 비난은 광란이라는 셈법은 도무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이란 본디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려니 하기엔 그들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렀던 정의와 도덕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가. 이젠 못마땅한 걸 넘어 역겹다.



감사 (2019.08.29)


아침마다 내게 있는 감사할 조건을 헤아리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누군가 부러워할 것이 내게 있다면 나는 복 받은 게 분명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니 기도 시작하면서 머뭇거릴 일이 없는데, 도무지 걷히지 않는 안개에 가로막혀 머뭇거리고, 급기야는 건성으로 시간만 때우다 만다.


오늘 아침에는 작정하고 복을 세어보기로 했다. 우선 어머님으로부터 형제, 조카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건강 때문에 크게 어려움 겪지 않고 나름대로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건강 때문에, 또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고통 받는 이웃이 있는데 내놓고 감사를 드리는 게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결 수월하게 기도를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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