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자면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없다. 월급은 늘 모자라는 것이고 평생 월급으로 살았으니 더욱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행히 헌금하는 데는 구애를 받지 않았다. 믿음이 헌금의 크기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내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통제에 든다는 것인데, 돈에 매어 헌금을 망설인다면 내 삶이 돈의 통제에 드는 것이니 그것을 제대로 된 믿음이라 하겠나. 돈에 매어 살기는 했어도 온전히 돈의 통제에 들지는 않았으니 크게 감사할 일이다.
코로나 감염을 걱정해서 많은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집에서 드릴 수 있도록 결정했다. 개중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어 걱정스럽다. 헌금이 줄어들까봐 그렇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는 해도 내 삶이 하나님의 통제에 든다는 선언인 헌금이 한낱 재물로 가벼이 여겨지는 것이 마음 아프다.
선거란 당선되어야 할 사람 당선되어야 할 정당을 선택하는 일이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당선되지 말아야 할 사람 당선되지 말아야 할 정당을 떨어뜨리기 위한 선택이 되게 생겼다.
독선이라는 말을 毒腺으로 쓰는 게 아니라 獨善으로 쓰는구나. 어감으로는 ‘독을 뿜어내는 샘’일 줄 알았는데 ‘자기 홀로 선하다’는 말이었구나. 번역하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겠다.
코로나19가 그토록 창궐하는데도 마음이 놓였던 것은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브리핑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가 뭔지는 막연했다. 한겨레 구본권 기자는 “상세하고 투명한 브리핑이 국민들로 하여금 보건당국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신뢰를 갖게 했다”고 보도했는데, 과연 그렇다. 자신 없으면 무슨 설명이든 말이 꼬이게 마련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이번 사태가 사회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에 정은경 본부장이 크게 기여하였다.
노인 세대가 서민에서 영세민으로 전락하는 건 대부분 질병 때문이라고 한다. 적은 수입으로 근근이 삶을 꾸려가는 이들에게 질병은 결정적 한 방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19의 공포가 세상을 휩싸고 있다. 있는 사람들이야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지만 어려운 이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싸움이 될 텐데. 이젠 이 사태가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아침마다 이 어려움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은 커져만 간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 있다.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병이 있다는 말이다. 근심도 그런 모양이다. 크게 깨닫고 모두 털어낸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곤 한다. 은혜를 입고 살면서 왜 이렇게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생각해보니 사는 게 그저 그런가보다 하면 될 일이었다.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병처럼.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으니.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 예배하기 위해 모이지만 교우 하나하나가 모여 이룬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우들이 함께 하다는 것 자체도 예배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어울려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니 말이다. 결국 이곳에서도 가정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스로 예배를 준비하면서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경험하였다는 분들을 보면 그것도 뜻 깊은 일일 수 있겠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두어 주 가정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이 많아 교회가 썰렁하던데 당분간 교우들을 보지 못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영 좋지 않다. 타국에서 외롭게 지내는 중에 예배드리느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는데.
혜인 아범이 성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유럽 오페라 무대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놀랍게도 하나님 은혜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십 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코로나 광풍이 대륙을 건너 이탈리아를 초토화시키고 파죽지세로 독일까지 휩쓸고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감염자가 한국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혜인 아범은 오월에 열리는 오페라 축제 무대를 준비하느라 연습에 한창인데 백여 명 인원이 무대에서 복작대고 있어 혜인이 혜원이 때문에 크게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이웃 도시까지 감염자가 생겨난 상황에서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밀집해 노래 연습을 해야 하니 왜 걱정이 되지 않을까. 다행히 오늘 모든 연습을 중단하기로 했단다.
아내와 나는 연습 중단 소식에 한시름 놓았지만 혜인 아범은 편치만은 않은 모양이다. 잠시이기는 하지만 무대를 떠나는 일이 낯설기도 하고 어쩌면 두렵기까지 한가 보다. 무대에 서기 시작해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그런 마음이 들만도 하겠다. 처음 독일 오페라 무대에 섰을 때 과분한 은혜에 우리 모두가 감격했지만 그것도 십 년이 넘어가니 언제부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그동안 얼마나 충실히 살아왔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자신을 정비해서 새로운 십 년을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게 이론이라면 글쓰기는 실제이다. 이론이 실제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가 필요한 것처럼, 머릿속 생각이 변변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글을 쓰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쓴다. 하지만 아직 열에 하나 변변한 글을 얻기가 어렵다.
오스트리아 수상은 코로나 확산을 방지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민의 출입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일하러 갈 때, 생필품 살 때, 남을 도울 때’. 남 돕는 일이 일하는 것만큼, 생필품 사는 것만큼 긴급한 일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국가는 모름지기 이 정도 되어야 품격이 있다고 하겠다.
나는 재앙은 자연현상이거나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태계를 인간이 파괴해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생태계 파괴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전염병은 또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1984년 한강 대홍수 때 한강 하류의 둑이 터져 그 너른 일산 벌판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집들이 물에 잠겼다. 처가 동네 역시 범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지은 지 백 년도 넘는 처가 바로 앞에서 물이 멈췄고, 물에 잠긴 건 하나같이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집들뿐이었다. 동네 어른들께서 그곳은 워낙 물에 잠기는 곳이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범람되는 땅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워낙 범람하는 곳이니 집을 지어서는 안 되고, 집을 지을 요량이라면 온전히 범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어야 했다.
우리에게 한강 대홍수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런 홍수는 늘 있어왔고, 그래도 큰 피해 없이 살아왔다. 범람해도 견딜 수 있도록 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강 대홍수 때 입은 피해의 대부분은 인재였다고 생각했다. 요즘 세계를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이 생태계를 무절제하게 침범한 결과라는 해석을 접하면서 오래 전 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물만 보이면 손을 씻으라는 권고를 따라 요즘은 여느 때보다 손을 열심히 씻는다. 이 작은 행동 하나가 나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이웃을 지킬 뿐 아니라 사회를 지키는 일이라니 놀랍다. 어디 손 씻는 것만 그렇겠나. 나 하나 바로 서면 그것이 나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길인 것을.
정직은 결국 유익이 되어 돌아온다.
곤란한 상황을 만났을 때 잠시 둘러대면 될 일을 곧이곧대로 설명해 원망을 들은 일이 많다.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말 때문에 더 큰 곤경을 면하곤 했다. 둘러대는 게 결국은 제 발등 찍는 일이더라는 것이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잘못한 일 후회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고,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굳이 그 시간으로 돌아가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때 잘못한 일 부끄러운 기억이 오늘 나를 빚은 원동력이 되었으니 나름 의미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료를 만드는 것만큼 자료 폴더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쏟는다. 글도 그렇고 글의 원천이 되는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생각이 그저 생각으로 그쳐서 어떻게 나아질 수 있겠나. 잘 갈무리해서 언제든 열어볼 수 있어야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거기서 생각을 더 키워나갈 수 있지 않겠나. 요즘이야 검색 기능이 좋아져서 굳이 자료 정리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게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머릿속까지 검색할 수는 없으니 이런 자세를 버릴 필요는 없겠다.
코로나 사태로 보름 꼬박 집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나갈 수도 없고, 나가서 할 일도 없다. 지금 같아선 보름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이참에 퇴직 이후의 삶의 방식을 연습해보고 있다. 퇴직하고 나면 나갈 일도 별로 없을 것이고 나가지 않으니 집에서 아내와 둘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자식이 유학을 떠난 이래 십오 년 넘게 둘이 살기는 해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으니 과연 생각한 대로 살아질지 모르겠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함께 규칙을 정했다. 조금 일찍 일어나 한 시간 기도 하고, 두어 시간 걷고, 조금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저녁 시간까지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 식사는 같이 준비하기로 했다.
해보니 규칙을 지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일어나는 시간이 자꾸 늦어지고 이후 계획이 다 엉클어진다. 저녁 먹고 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TV보는 것 말고 딱히 할 일이 없다. 부지런해지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고, 저녁 이후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 보름이 지나고 나도 사무실 문을 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퇴직 이후 적절한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시간이 지극히 생산적인 시간이 될 수도 있겠고.
항공편이 끊기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삶에 절제가 부족했던 것을 반성했다. 항공사 직원이 무급 휴가를 강요당하고 여행사들이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에 그 정도 피해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내를 청소하던 노동자들이 생계가 막막해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에게는 절제해야 할 일이 누구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라니.
아침 식탁에서 아내가 이번 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데 눈물이 났다. 아, 나이가 드는가 보다.
휴업 상태에서 일과를 정하고 그것을 지킨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정한 일과를 지키지 못해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들지만 다음 날 같은 후회를 되풀이한다. 운이 없으면 백세수를 한다는 세상에 퇴직 후의 그 긴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인데. 단순반복 작업에도 잘 견디던 끈기는 어디로 도망간 걸까? 시작이 반이니 우선 제 시간에 일어나자. 그러려면 제 시간에 자고.
문득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밖에 없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이 말씀을 되새기는 중에 그동안 해석되지 않았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이해되었다.
성경 읽기 (2020.03.29)
1983년에 성경 읽기를 시작해서 오늘로 서른여덟 번을 읽었다. 한 해에 한 번은 읽은 셈이다. 대부분 개역한글판을 읽기는 했어도 좀 더 이해해보려고 표준새번역, 현대어성경, NIV를 읽기도 했고 성경 전체를 연대기별로 재구성한 연대기성경도 읽었다. 단어의 뜻이 선명치 않아 간이국한문 성경도 읽고, 이번에는 어렵게 구한 1912년판 한문성경을 개역한글판과 대조하며 읽었다. 최근 몇 년은 개정개역판을 주로 읽기는 했어도 내게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읽어온 개역한글판이 편하다.
자식에게 선물로 줄 생각으로 꼬박 세 해 걸려 성경을 쓰기도 했다. 성경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간 여러 번 읽고 지나갔음에도 이런 말씀이 있었나 싶게 생소한 부분이 있어 진작 성경 쓰기를 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몇 달이 지나고 한 해를 넘기면서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성경을 보면서 성경 쓰기 시작한 걸 오히려 후회했다. 시작한 것이니 그만두지 못하고 꼬박 세 해를 씨름해 성경 쓰기를 마치고 났어도 마쳤다는 것 외에 딱히 얻은 게 없었다. 그 후로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 쓰기에 몰입해 있던 세 해 동안 비로소 내게 영성이라는 게 생겨났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루했으나 큰 은혜를 입은 시간이었다.
몇 년 전, 교우 한 분이 권해서 성경 타자에 도전한 일도 있었다. 아내와 함께 시작해 서로가 경쟁도 하고 서로에게 격려도 되어 힘든 줄 모르고 한 해 만에 성경 타자를 마쳤다. 덕분에 독수리타법에서 자판을 보지 않고 거의 읽기 속도로 타자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역량을 키웠다. 덤이라고나 할까.
생각지 않게 칩거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매일 거르지 않고 읽어 성경 읽기 연속기록이라도 한 번 만들어 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