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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09. 2021

위민 투 드라이브 (Women To Drive)

비는 한 방울의 물로 시작된다

마날 알 샤리프

김희숙 옮김

혜윰터

2021년 4월


‘여성 운전’의 장을 열다


사우디에서 여성 운전이 허용된 지 삼 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이곳에서 운전하는 여성을 보는 게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사고를 내고 쩔쩔매는 여성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며칠 전에는 여성 운전자가 교차로에서 머뭇대는 통에 나까지 사고를 낼 뻔했다.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여성 운전이 실현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리고 그 희생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여성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차별에 신음하고 눈물지었다.


십 년 넘게 사우디에서 살면서 수많은 여성 차별을 지켜봤고, 세계 유일한 여성운전 금지 국가에서 벗어나는 감격적인 순간을 함께 맞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남녀가 유별한 곳이라 사우디 여성을 만날 기회조차 없어서 그들이 어떤 차별에 신음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여성 스스로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이곳에 오래 산 교민들을 통해 가정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도 어느 매체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적지 않은 시간을 부대끼며 살았음에도 그들의 가정사는 내게 온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다.


왕정 국가인 사우디에서 갖은 위협을 무릅쓰고 여성 운전 캠페인을 벌인 사십 초반의 저자 마날 알 샤리프는 사우디에서 보기 드문 전문직 여성이다. 신실한 종교적 배경에서 자라나 원리주의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아람코에 입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근무하면서 독신 여성에게 쏟아지는 갖은 제약과 편견을 새삼스럽게 깨달아간다. 또한 아람코 근무지와 거주단지의 이질적인 환경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국유화로 인해 예전의 모습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아람코는 아직도 서구사회의 가치와 관습이 상당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지켜온 가치와 관습이 이슬람 신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교리를 남성의 관점에서 편할 대로 해석한 가부장적 악습인 것을 깨닫는다.


아람코;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기업으로 석유ㆍ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석유화학제품 생산과 정유사업을 수행한다. 과거 사우디가 매우 강력한 규율로 통제하던 1970년대에도 미국 자본과 문화의 영향이 매우 강했던 아람코는 사우디의 별천지 같은 공간이었다. 영화ㆍ복장ㆍ음주 등 어떤 분야에서도 제한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아람코가 소유하고 있던 TV 채널에서는 서방물이 많이 든 프로그램들을 방송해서 외국인 근로자는 물론 주변국에서도 매우 인기를 끌었다. 1980년 국영화 이후 이러한 양상이 상당히 위축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우디 어느 기업 어느 공간보다 개방적인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운전 캠페인을 주도한 것은 그런 깨달음 때문에 생겨난 주의주장이나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실생활에서 겪는 고통에 가까운 불편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캠페인을 계획하면서 “방어도 공격도 하지 말고 단지 젊은 여성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고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자”고 호소한다. 시위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 그룹이 아닌 개인으로 이 캠페인에 참가하기를 요청한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가족이 처하게 될 위험을 일깨우며 이를 말리고, 온라인에서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비도덕적인 여성들이라는 비난이 빗발친다. 젊은 여성들을 망치려고 기획된 것이며 이슬람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비난도 잇따른다. 창녀ㆍ부도덕한 사람ㆍ배신자ㆍ친서방파 심지어 이중간첩이라고 비난한다. 직장에서조차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예의를 지키며 미소 띤 얼굴로 이들을 대하고, 공손하게 “나는 사우디 사람이고 사우디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고 내 조국을 사랑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이 불합리한 관행을 바꾸고 싶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여성 운전을 향한 투쟁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저자는 사우디 최고의 대학인 킹압둘아지즈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아람코에 정보보안 담당으로 입사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헌신과 결단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상하기 힘든 가난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는 세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 의사와 아람코 엔지니어와 석유 엔지니어로 키워낸다. 저자는 고향인 메카에서 1,500km 이상 떨어진 근무지로 옮겨야 했지만, 여성 혼자서는 호텔이나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금하는 사우디 법률 때문에 집을 구하는 일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구하고 근무를 시작한다. 그에게도 사랑은 찾아와서 동료와 결혼한다. 전형적인 사우디 보수적인 남성으로 자라난 남편은 결혼하면서 저자에게 직장을 그만 둘 것을 요구한다. 다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를 요구하고, 남성 직장 동료와 이야기한 것을 보고는 창녀라고 욕한다. 남편의 억압과 폭력을 견디지 못한 저자는 결국 이혼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저자는 아들 아부디와 함께 아람코 주거단지에 집 하나를 얻는다. 전 남편이 동의하지 않아 아부디가 자기 아들인 것을 밝힐 수 있는 아무런 증명서도 얻을 수 없어 단지 안에 있는 사설시설에서 아들이 교육 받도록 한다. 회사 연수 프로그램으로 미국에서 1년간 머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떨어져 산다. 연수에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살게 된 저자는 단지 밖의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돌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미국에서는 가능한 운전이 왜 사우디에서는 안 되는지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이 여성 운전 캠페인인 Women2Drive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그 캠페인이 사우디 여성 운전을 위한 첫 번째 움직임인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어수선하던 1990년, 여성 47명이 운전금지에 저항해 한 줄로 차를 몰고 30분 동안 리야드 시내를 돌다가 종교경찰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여성들과 그 남편들은 1년간 해외출국이 금지되었다.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해고되었다. 종교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 전국의 모스크에서 금요일 설교 때마다 그 사건이 거론되었으며, 사우디 사회를 파괴하려는 부도덕한 암 여우라고 매도당했다. 사진기자인 살레 알자즈는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사실 사우디에는 여성 운전을 금한다는 교통 법규가 없다. 다만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았을 뿐이며,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는 근거도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내무부에서는 여성이 운전하는 것은 불법이며 벌금형에 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교통법규는 아니다.) 이는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해석한 결과를 근거로 삼은 결정이지만,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대에 여성이 당나귀를 타고 다닐 수 있었는데 자동차라고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며 반박하는 이도 있었다.


저자는 Women2Drive 거사일인 2011년 6월 17일을 한 달 앞둔 5월 19일에 아람코 거주단지를 벗어나 일반도로로 진출한다. (단지 안에서는 여성 운전이 허용된다.) 그리고 체포되어 5월 30일에 석방되기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감옥에서 고통을 당한다. 저자는 운전에 앞서 교통법규를 샅샅이 살피고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근거 없는 일인지 준비한다. 물론 그런 저자의 반론을 거들떠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자가 석방되고 나서 거사는 예정대로 치러진다. 저자는 주위의 만류로 이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거사 당일 여성 36명이 운전에 나선다. 이미 이 캠페인은 사우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 여성들은 리야드에서 채 한 시간이 안 되게 운전하고, 제다와 알코바에서 운전했다. 경찰관들은 이를 보고도 차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단속된 이들을 집까지 호송하고, 다시는 운전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사우디 면허증 없이 운전했다고 스티커를 발부하기는 했지만, 운전한 여성들을 체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계의 관심을 끈 캠페인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운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가 체포된 이후 몇 주 사이에 왕실에서 많은 칙령을 반포한다. 여성이 상점과 쇼핑몰에서 판매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여성 속옷을 더 이상 남성 판매원이 팔 수 없도록 했다. 몇 달 후 국왕은 여성도 지방선거에 출마하고 국왕의 자문위원회인 슈라 위원회에도 참여할 기회도 가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캠페인은 여러 국가에서 많은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여섯 명의 미국 여성의원들이 존경을 표하는 편지를 보냈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여성운전을 허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동조 캠페인이 일어났고, 미국에는 사우디 여성을 위한 경적소리(Honk for Saudi Women)라는 그룹이 생겨났다. 타임지의 ‘올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올라 뉴욕의 갈라 디너에 초대돼 미아 패로우를 만나고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전 세계 인권운동가들의 연례행사인 ‘오슬로 자유포럼’에 초대되어 미얀마 아웅산 수치 등과 함께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힐러리 클린턴과 매들린 울브라이트가 시작한 미국 NGO Vital Voices에서 글로벌 리더십 상도 받았다.


넓고 깊은 여성 차별


저자는 여성 운전 캠페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사우디에서는 그저 뿌리 깊은 여성 차별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람코에서는 지속적으로 해고의 위험을 경고하며 업무에서 제외했으며, 오슬로 자유포럼 참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저자는 결국 사표를 내고 포럼에 참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는 중에 자신을 응원하는 동료인 브라질 출신의 컨설턴트 라파엘을 만나 크게 격려 받고 결국 그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지지와 격려가 바탕이 된 것이었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저자의 처지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사우디 정부에서는 라파엘과의 결혼을 허가하지 않았고, 결국은 캐나다까지 가서야 결혼증명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들인 아부디와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전 남편이 동의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년에 두 번 엄마를 만나게 하겠다는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다. 저자는 양육권을 얻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사우디 정부에서는 법적으로 재혼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양육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한다. 라파엘과 두바이로 옮긴 저자는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매번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갔다가도 이슬람의 주홍글씨 때문에 47번이나 취업에 실패한다.


사우디에서도, 두바이에서도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저자와 라파엘은 호주로 거처를 옮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지내는 일은 저자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게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은 라파엘과 이혼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함자와 함께 여성 운동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어도 사우디 여성으로서 차별과 억압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조국을 떠난 것이다.


비록 사우디에서 십 년 넘게 살고 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우디에서 여성이 그토록 차별과 억압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전에 교우 한 분께서 가까이 지내는 사우디 부인이 딸이 남편에게 매 맞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 데려왔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재력도 지위도 남에게 빠지지 않는 유복한 가정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귀하게 자라난 여성도 남편에게 매를 맞고 살고, 그것을 친정 부모도 형제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에 상당히 놀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 내내 폭력이 떠나지 않는다. 저자는 부모에게 맞고 자란다. 사우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하지만 자기에게 간절히 구애했던 남편에게도 예외 없이 매를 맞고 살았다. 학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살은 선생님의 것이고 뼈는 부모님의 것이라고 여긴다. 필요하면 언제든 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체벌로 죽은 학생도 있다. 이와 같이 학교와 집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폭력은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우디는 2012년이 되어서야 가정폭력에 관한 법이 생겼다. 지금도 그 법이 지켜지는지 의심스럽지만, 그 법이 생기기 전에는 어땠을까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숨이 막힌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말로만 듣던 여성 할례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제 사십을 넘긴 젊은이이다. 그런 저자도 할례를 받았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이 하도 끔찍해서 관련 자료를 검색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은 이슬람의 가르침도 아니었고, 그저 소녀의 성욕을 제거함으로써 성적 일탈을 방지한다는 가부장적 사회의 악습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사우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억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후견인이나 마흐람(보호자. 아버지 오빠 남동생 삼촌 심지어 아들이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이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다. 여성만 집에 있으면 강도가 들어도 경찰이 들어갈 수 없고 불이 나거나 응급환자가 생겨도 소방관이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다. 2014년 킹사우드대학 캠퍼스에서 심장병으로 쓰러진 여학생은 학교 관계자들이 여성만 다니는 학교에 남성 구급대원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막는 바람에 죽었고, 2016년에 카심대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학교는 견고하고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가려 놓는다. 학교에 안뜰이 있기는 하지만 여학생은 처녀성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달리기나 점프를 금하기 때문에 운동장을 없앴다. 학교 교문은 아침에 열어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들어가면 하나 밖에 없는 열쇠로 굳게 잠그고 교장선생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다시 열 수 없다. 비상구도 없다. 2002년 메카 중학교에서 화재가 일어나 소녀 15명이 죽었는데, 종교경찰들이 이슬람 복장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아바야(온 몸을 가리는 여성 겉옷)를 입지 않은 여학생들이 현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여성 운전 캠페인을 벌인 데에는 단지 불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자기가 아는 거의 모든 여성이 기사에게 추행 당한 적이 있다고 고발한다. 외모를 두고 한 마디씩 하거나, 대화를 엿듣다 끼어들거나, 택시비를 더 요구하거나, 부적절하게 여성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이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도 있고, 심지어 아이들 통학 기사로 고용된 운전사가 아이들을 성희롱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사우디에서는 성희롱은 범법행위가 아니다. 정부기관 특히 종교경찰은 여성의 외모 때문에, 걸음걸이나 향수를 뿌렸기 때문에 희롱 당했다면서 항상 여성을 비난하고 여성을 범죄자로 만든다.


저자는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닌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10년 이상 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가족과 싸우고 전남편과 싸우고 사회와 싸웠다. 내 얼굴은 곧 나의 정체성이다. 아무도 내 얼굴을 가릴 수 없다. 나는 내 얼굴이 자랑스럽다. 만약 내 얼굴이 당신에게 거슬린다면 쳐다보지 마라. 당신 얼굴을 내게서 돌리고 시선을 거두라.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유혹을 느낀다면 그건 당신 문제다. 그러니 내게 얼굴을 가리라고 말하지 말라. 단지 당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를 처벌할 수는 없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러나 얼굴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지금 한국에서 여성들이 차별을 거부하는 주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비는 한 방울의 물로 시작된다”


그렇게 여성이 차별 받고 억압 받는 사회에서 저자가 쏟은 열정과 희생은 도무지 결실을 맺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결국 비를 만드는 한 방울의 물이 되었다. 여성 운전 캠페인이 벌어지고 2년 뒤인 2013년 10월 수백 명의 여성이 운전을 감행한다. 2015년 12월 사우디 여성이 아랍에미리트 국경에서 사우디 쪽으로 운전을 시도하다가 체포된다. 그런 희생을 딛고 2017년 6월에 여성 운전을 허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드디어 2018년 6월 24일부터 여성운전이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여성 운전 금지라는 둑이 터진 것이다.


놀랍게도 이 책에서 언급된 여성 운전 캠페인 관련 사건은 모두 사우디에 부임하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과거 어느 순간의 기록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사는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비록 십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세월이지만 사우디 여성 인권은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를 맞고 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여성 변호사에게 면허가 발급되기도 했다. 여성에게 신분증이 주어지고 여권도 발급되었다. 여성 취업인구는 놀랍게 늘어나고 있다. 슈퍼마켓의 계산원은 거의 여성으로 바뀌었고, 여성용품 전문점은 아예 남성의 취업이 금지됐다. 지난 번 백신 접종 받을 때 여성이 주도적으로 접종소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견인이나 마흐람 제도는 아직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남편이 없으면 자식의 허락을 얻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 방울의 물이 비를 만들어 낸 것처럼, 저자의 노력과 희생이 씨앗이 되어 멀지 않은 장래에 사우디도 여느 나라처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


후기


이 책으로 인해 공백으로 남아있던 사우디 가정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었다. 저자가 태어난 메카야 무슬림이 아니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지만 그밖에 언급된 지역은 모두 가본 곳이기도 했고, 언급된 사건 사고 또한 모두 익숙한 내용이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그 상황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작 사우디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나는 이 책이 출간된 지도 몰랐다. 페이스북 친구이신 경희대 김석희 교수께서 읽고 추천하신 걸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추천하신 대로 소설가이기도 한 김희숙 선생의 번역이 매끄러워 책을 읽는 데 거북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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