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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11. 2021

단순한 진심

버려진 기억

조해진

민음사

2019년 8월


버려진 기억


‘철길에 버려진 문주라는 아이’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입양아 나나는 자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는 서영을 만나 혈육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간다. 나나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복희식당 주인 할머니를 만나고, 그가 맡아 돌보던 아이를 입양 보낸 걸 알게 된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의도치 않게 그의 삶에 끼어들어간 나나는 할머니가 입양 보낸 복희를 찾아내 임종 직전에 만나게 한다. 작가는 입양아와 입양을 보낸 이의 시선과 기억이 얽히며 풀리는 과정을 시종일관 건조하게 그려낸다.


나나는 입양아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양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다. 그러나 이미 ‘버려진 기억’이 새겨진 나나는 양부모의 사랑을 받지만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나는 양부모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떼쓴 적이 없다. 비싼 학용품, 여행, 왁자지껄한 생일파티 같은 것. 몸살 기운이 있어도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잠든 척했고,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 인종차별 섞은 성희롱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외식이라도 하는 날엔 양부모가 고른 것보다 싼 음식을 찾느라 메뉴판을 샅샅이 살폈고, 그들이 선생님에게 불려가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모든 규율에 순종했다.”


양부모도 부모인데 그 마음을 읽지 못할까. 나나가 전화로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양모인 리사는 “새 생명이 네게 그렇듯 너 역시 우리에게는 소중한 존재야. 지금은 어느 때보다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너무 자신을 절제하지 마.”라며 “네가 원하는 것을 숨기려 할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다.


아무리 사랑을 받고 자랐더라도 자기가 버려졌다는 기억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그래서 다시 버려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절제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그래서 혈육을 찾으면 다른 것이 아니라 늘 감추고 살았던 자기를 내놓고 싶었던가 보다.


“내가 원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벼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는지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날 돌봐 준 그분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입양아와 입양을 보낸 이의 시선과 기억이 얽히고 풀리는 중에 유독 이 부분이 내 눈길을 끌었다. 사랑 받고 자랐다고 상처가 지워지는 건 아니라는, 그래서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던 어느 노배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기억에 관한 소설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이니 무엇보다 줄거리가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야 글에 몰입할 수 있고, 몰입해야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언제부턴가 상징과 은유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줄거리가 뭔지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읽으면 따라가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애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때부터 소설과 멀어졌을 것이다.


그런 내가 읽을 만한 작품이라고 했다.


책을 열고나서 단숨에 읽었다. 그렇게 만들만큼 소설은 시종일관 긴장을 잃지 않았다. 문장은 소설에 몰입하는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간결했고, 형용사와 부사 없이도 인물들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작중 인물이 되어 사건을 따라갈 수 있었다. 기억과 입양을 이야기했던 이균영의 단편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읽으며 느꼈던 긴장감을 떠올릴만한 수작이었다.


차별과 혐오 속에 버려진 생명과 ‘단순한 진심’으로 이들을 감싸 안고 다독이는 이들이 만나 새로운 ‘우주’를 열어가는 이야기이다. 겪어보지 않았고, 그래서 이해는커녕 짐작하기도 어려운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단순한 진심’을 내보일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모처럼 좋은 작품을 만났다. 조해진이라는 작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설에 대한 흥미를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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