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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10. 2021

[사우디 이야기 48] 아람코

사우디 이야기 (48)

“아람코 단지는 오랫동안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푸릇푸릇한 골프장과 잔디밭, 야자나무, 공원, 수영장 등이 갖춰진 이곳은 흡사 캘리포니아 남부 여느 마을처럼 보인다. 아람코 단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내부에서는 사우디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어울린다. 여성은 머리카락이나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여성도 운전할 수 있다. 어떤 금지사항도 제약조건도 없다. 게다가 보호도 받는다. 지역경찰이나 종교경찰도 아람코 구내로 들어올 수 없다. 자체 경비대와 소방대가 있다. 마치 사우디에서 분리된 독립국처럼 단지 안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한다.”


2011년 사우디 여성 운전 캠페인인 ‘Women To Drive’를 주도한 ‘마날 알 샤리프’가 동명의 책에서 묘사한 아람코 주거단지의 모습이다.


아람코라고 하면 대체로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을 떠올린다. 그러나 사우디 안에서는 ‘아람코’라고 하면 ‘기업’보다는 국가의 이슬람 통제가 미치지 않는 ‘해방구’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몇 년 전 CNN의 르포 기사에서도 아람코 주거단지를 캘리포니아의 일부로 느껴진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내용이 아람코의 실체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먼저 기업으로서의 아람코를 살펴보자. 아람코(ARAMCO)의 공식 명칭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회사(Saudi Arabian Oil Company)이다. 공식 명칭과 아람코라는 약어는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데, 이는 아람코의 모체가 사우디ㆍ미국 석유회사(Arabian-American Oil Company)였기 때문이다.


아람코는 사우디 정부로부터 석유채굴허가를 받은 1933년 Standard Oil of California(SOC)의 자회사의 형태로 설립되었으며, 이후 엑슨ㆍ모빌ㆍ텍사코 같은 다른 미국의 정유사들이 추가로 사업에 동참했다. 대형 유전을 차례로 개발하여 짧은 시일에 세계 최대의 산유회사로 성장한 아람코는 사우디 정부에 의해 완전히 국유화되기 전까지 사우디 전체 산유량의 97%를 담당했다. 아람코가 급성장함에 따라 중동에서 미국의 위상이 크게 향상되었지만,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었던 자원국유화 정책을 넘지 못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20여년에 걸쳐 사우디 정부가 지분 100% 소유하는 국영기업으로 전환되었다.


아람코는 유전과 천연가스전을 100여 곳 넘게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 세계 최대의 육상 유전인 ‘가와 유전’과 세계 최대의 해상 유전인 ‘사파니야 유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원유 매장량이나 하루 생산량도 단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18년에는 연매출이 400조 원에 순이익이 120조 원을 넘어 애플ㆍ아마존ㆍ구글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2021년 한국 정부예산은 558조 원이고 사우디는 300조 원에 미치지 못한다.


아람코는 2019년 12월에 처음으로 전체 주식의 1.5%를 사우디 증권시장에 상장시켰는데, 당시 형성된 주가를 기준으로 하면 아람코의 기업 가치는 사우디 정부에서 하한선으로 여기는 2조 달러(2,200조 원)에 다소 미치지 못했다.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의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상장 이후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상장 초기에 형성된 주가에서 등락을 거듭할 뿐 좀처럼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람코 상장 계획은 전적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고 있다. 왕세자는 지나친 석유의존도를 줄이고 대신 첨단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다양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바로 이 재원의 상당 부분을 아람코 주식공개로 충당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아람코 기업 가치를 이보다 훨씬 낮은 1조~1.5조 달러 정도로 평가하고 있어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많은 이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아람코는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정유시설이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공격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장만 난무할 뿐 시원하게 밝혀진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때로는 사우디 자작극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던데, 아마 아람코 기업 가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왕세자의 모습이 그런 억측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란 아람코 본사 안에 있는 킹압둘아지즈 문화센터>


그러나 기업으로서의 아람코는 일상생활과는 관계없는 일이고, 일반인들에게는 앞서 말한 것처럼 사우디 안에 있으나 사우디의 구속을 받지 않는 ‘해방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속박은 작동하지 않는다. 온몸을 아바야라는 검은 옷으로 가리고 머리카락과 얼굴을 온통 가리는 니캅을 써야하는 복장에 대한 의무를 지킬 필요도 없고, 지켜서도 안 된다. 이제는 아바야조차 입지 않은 외국인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공공장소에서 팔이나 종아리를 내놓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우디 사회는 접객업소의 남녀좌석 구분이 없어지고, 영화관이 생기고, 여성이 운전도 하고 스포츠도 즐길 수 있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람코 단지 안에서는 애초부터 그런 속박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우디 정부의 국영화 조치로 1980년 미국이 아람코를 양도하면서 여성 고용을 계약조건으로 명시함에 따라 국영화 이후에도 아람코에서만큼은 여성 고용이 계속 이어졌다.


<아람코 다란 컴파운드>


아람코는 생겨났을 때부터 영화와 공연이 이어지고, 음주와 가무가 가능하고, 서구의 TV프로그램들이 채널3를 통해 여과 없이 방송되기도 했으며, 자체 경비시스템과 소방서가 있을 뿐 아니라, 지역경찰이나 종교경찰이 단지 안으로 진입할 수도 없었다. 물론 단지 밖 세상에도 영화관이 생기고, K팝스타의 공연에서 열렬한 여성 팬들이 아바야를 벗어젖혀 휘두르면서 열광하기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음주는 구속이나 추방에 이르는 범죄이고, 조금만 미풍양속에 위배된다 싶은 방송은 가차 없이 끊어버리고 막아버리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아람코 단지 안에 산다고 해서 모두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국영화로 이미 아람코 직원의 대다수가 사우디인임에도 정작 사우디인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시설이나 혜택이 적지 않다고 한다. 허용한다고 해도 서로 눈치 보느라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도 못하고, 남들이 그러는 모습을 보면 마음에도 없이 서로를 비난해야 한단다.


아람코는 기업의 위상만큼이나 시설과 복지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사우디 거의 모든 공항에는 아람코 창구가 따로 있으며, 아람코 전용 공항도 무려 열 곳이나 된다. 단지 아람코 항공기 취항만을 위한 공항이 말이다. (사우디에 국제공항 아홉 곳, 국내공항 열아홉 곳, 군 공항 다섯 곳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홍해 항구도시인 얀부는 리야드 행 여객기가 하루 한 편 운항하는데, 시간대가 아람코 항공 운항시간 근처라 출장 갈 때마다 자사 항공기를 이용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도대체 아람코에 항공기가 몇 대나 되는지 궁금했다. 예전에는 수십 대에 이르렀다고 하던데, 얼마 전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그동안 상당수 정리했다는데도 현재 운항 중인 중형 여객기가 일곱 대나 되었다. 아람코 다니는 분께 부럽다고 이야기하니 출장 때 아람코 항공을 의무적으로 이용해야 해서 오히려 불편하다고 하더라마는. 아람코 전용 창구는 공항 뿐 아니라 병원에 있는 것도 보았다. (아람코 직원 수는 10만 명 정도로 국내 삼성전자 직원 수와 비슷하지만, 매출은 삼성전자의 6배 정도로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람코 항공>


사우디에는 우리와 달리 개인이나 법인 소유의 해변이 상당히 많다. 경치 좋은 해변에 가면 주택 뿐 아니라 기업ㆍ기관 소유가 되어있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걸프해에 반달곶(Half-moon Bay)이라는 지역이 그나마 몇 안 되는 명소인데, 해안 상당 부분이 호텔이나 기업 전용해변이어서 일반인은 한쪽에 개방해놓은 해변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홍해 최대 항구도시인 제다에도 해변의 상당 부분이 이렇게 막혀있기도 하다. 그런데 반달곶 중 가장 노른자위 지역에 아람코 해변이 있다. 언젠가 조선소 건설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홍해 얀부 해안을 답사하는데 그 중 아름다운 곳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그곳도 아람코 휴양시설이어서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이와 같이 일반인들에게는 아람코와 그 시설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아람코는 모든 업체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사우디 최대의 발주처이기도 하다.


아람코는 워낙 규모가 방대하기 때문에 발주하는 사업의 형태도 다양하고 규모도 엄청나다. 그러다 보니 아람코에 참여업체 등록을 하는 절차도 매우 까다롭다. 우선 업체의 각종 절차가 아람코 표준에 맞도록 잘 수립되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회사 실적이나 보유기술자의 경력이 아람코 표준에 부합해야 한다. 등록절차가 워낙 까다롭다 보니 아람코 아닌 다른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협력업체로 등록할 때 ‘아람코 등록 기업’ 확인서로 등록절차를 갈음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기업들은 일을 잘하는 만큼 서류가 잘 받쳐주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람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서요 서류로 진행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절차는 이미 절차서에 규정되어 있고, 그에 어긋나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일을 하고 서류는 따라가면 된다는 한국 현장의 사고방식은 이곳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즉, 일반적인 토목이나 건축 현장에서는 시공도면에 적시해놓은 내용이라 해도 현장책임자의 재량으로 변경 시공하고 추후에 관련 서류를 맞춰놓는 경우가 많은데, 아람코 현장에서는 모든 변경 내용은 반드시 사전에 승인을 얻어 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계변경 이력도 철저하게 관리해서 도대체 일하자는 건지 서류 만들자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서류가 많다고 불평하는 걸 들은 일도 있다.


이미 오래 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람코 기술연구소 주택단지 건설을 맡았던 국내 유수의 건설회사 하나가 계약금액이 3억 5천만 달러인데 아람코 절차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공기가 지연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 근로자 천여 명을 데려 오고, 공사비는 7억 달러 넘게 투입되고, 본사 부회장이 불려와 사과까지 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아람코는 한국 에쓰오일의 최대주주이고 현대오일뱅크의 2대주주로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기업이다. 물론 한국에 지사도 있다. 내가 부임하던 2009년만 해도 아람코에서 한국인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채용을 시작해 지금은 상당수의 엔지니어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사우디에 사는 한국인은 이곳에 뿌리는 내리고 사는 교민, 지사ㆍ현장 근무자ㆍ가족으로 이렇게 둘로 크게 나뉘었다. 파견 근무자나 가족은 임기가 끝나면 돌아가기 때문에 거주기간은 20~30년이거나 3~4년이고 그 중간은 없었다. 하지만 아람코나 이제는 아람코의 자회사가 된 SABIC과 같은 공기업 근무자가 늘면서 그 중간을 채우는 새로운 교민이 생겨난 것이다. 공기업에 합류한 한국인들은 모두들 모범적인 자세로 근면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는다. 왜 그렇지 않겠나. 앞으로 좀 더 많은 한국인들이 선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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