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by 박인식

생업으로서의 예술 (2020.07.01)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고 넉 달. 이미 적지 않은 기업이 도산했거나 도산에 직면해 있다. 아직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도 서서히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IMF 사태 때 꼭 그랬다. 처음에는 매출이 급격히 줄어들어 고전했지만 그래도 선방했다 싶을 정도로 잘 견뎌냈다. 문제는 한 해가 훌쩍 지나고 나서 터지기 시작했다. 급한 불 끄느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끌어다 댄 결과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몇 년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 내 눈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는 이미 몇 달 전에 직원 급여를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어제는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자식이 일하는 ‘비스바덴 오페라극장’은 주정부 소속이라 당장 급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계획대로 가을부터 연주가 재개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뉴스를 보니 해외에서 활동하던 연주자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하고, 어제는 어떤 행사에 그렇게 돌아온 연주자들만 백여 명 가까이 모였다는 기사도 났다.


경제학계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경기침체는 이동을 제한해서가 아니라 질병에 대한 공포 그 자체 때문이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의료계에서는 코로나 백신은 빨라야 내년 연말쯤 접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문화예술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될 만한 일이지만, 그것도 산업이고 거기에 목매고 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그것으로 생업을 잇는 자식을 둔 부모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감사와 간구 (2020.07.02)


내 기도는 삶에 대한 담론이었다. 매일 마주치는 크고 작은 문제는 내게 주신 능력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문제 하나까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이니 금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퇴근해 집에 돌아와 주차하는데 차가 멈췄다. 저녁 식사기도 때 아내가 길에서 고생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했다. 문득 그렇게 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작은 어려움에 도우심을 구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건 역시 망설여진다.



조언 (2020.07.03)


조언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조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내 조언을 받아들여 잘못을 고치는 걸 보는 건 기쁜 일이다. 명심할 것은 그 기쁨이 내가 조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섭섭해 할 일은 아니고. 그가 잘못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언했을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나라를 위한 기도 (2020.07.07)


도덕과 상식을 회복하는 나라,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정직 (2020.07.08)


아마 중학교 들어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하고 목욕 갔을 때 입구에 손님이 붐벼서 얼떨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목욕탕을 나오고 나서야 돈을 내지 않은 걸 깨달았는데, 아버지를 쳐다보니 그저 눈 한 번 찡긋하시고 말았다.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가는 게 귀찮았을 수도 있고, 돈이 굳었다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오십 년도 훨씬 넘은 일인데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기억이 난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잠깐 되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자라나는 자식을 눈앞에 두고 왜 그러셨을까.


그 기억이 불편하기는 했어도 그것 때문에 자식 앞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늘 조심스러웠다.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그런 일이 왜 없었겠나. 염치없는 생각이지만, 혹시 있었더라도 자식이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고 그저 아이들 앞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거울로 삼았으면 좋겠다.



연륜 (2020.07.08)


내 삶에서 나이 드는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후회 (2020.07.09)


호주에서 수년간 임종 직전 환자들을 보살폈던 호스피스 간호사가 자기 경험을 정리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라는 책을 냈다. 그중 하나가 ‘내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는데, 나도 그럴 것 같기는 하다.



교회를 위한 기도 (2020.07.09)


도덕과 상식을 회복하는 나라,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나라보다 교회를 위해 먼저 했어야 했다. 도덕과 상식을 넘어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할 교회가 이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니.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코로나 이후 (2020.07.10)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일상으로 여겼던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지 않지만 달리 방법도 없어 지금부터 하나씩 포기해가고 있다. 이미 일상을 하나씩 정리할 나이이니 각오를 다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렇기는 해도 난관을 예상하고 각오를 다지는 것과 실제 난관을 맞닥뜨리는 일은 결코 같을 수 없는 법. 그리 되면 각오한 것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지는 않을지.



박원순 (2020.07.12)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제몫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다른 인사들과 달리 물려줄 재산 하나 없었고, 오히려 빚만 남겼다. 고위직 인사를 임명하기 전에 성인지 감수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에 “아마 그는 그 검증을 일등으로 통과했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을 만큼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 조차’ 넘어트릴 만큼 ‘성에 대한 폭력’은 강고하게 ‘성인 남자’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폭력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했다면 몇 년씩 지속할 수 있었을까.


지난 몇 년 만 돌아보아도 진영의 문제도 아니었고, 학식의 높고 낮음도 차이가 없었으며, 더욱 절망적인 것은 노소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몇몇 사람들에게 한한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나라고 다르겠나.


도대체 무엇이 모두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며,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가 많이 맑아졌는데, 어떻게 이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지.



불순종 (2020.07.16)


차별금지법에 대한 개신교계의 반대 논리를 살펴보다가 문득 그동안 내가 성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비난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살리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들이댔으니, 크게 꾸지람 들을 일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2020.07.16)


대리 시절 일이다. 현장에서 복귀했는데 일감이 없어서 꼬박 여섯 달을 놀아야 했다. 며칠 놀다 보니 그것도 할 일이 아니라 그간 겪은 현장업무를 정리해 절차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 마치지도 못하고 다시 현장으로 나가야 했지만, 그때부터 일하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이 내 역량을 키우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어제 ‘골목식당’에 방송 시작했다가 코로나로 석 달 넘게 개선작업을 멈춰야 했던 음식점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젊은 주인이 더 낙심할만한 상황이었는데도 오히려 그 시간동안 백여 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만들어냈고, 끝내 모두가 찬사를 보낼만한 멋진 결과를 만들어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하지만 늘 ‘기회’라는 모양으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위기’의 모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위기’를 ‘위장한 기회’라고 하지 않나. ‘위장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위장’을 벗겨내 ‘기회’로 만든 젊은 주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오래 전 같은 일을 해냈던 내 젊은 날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정상 (2020.07.20)


우리는 자의적으로 ‘정상’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범사를 ‘정상’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고, ‘정상’에서 벗어난 것은 틀린 것으로 여겨 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았다. 비록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정상’이라는 기준을 ‘차별’의 도구로 사용해왔다는 말이니,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 옳겠다.



공감 (2020.07.21)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누군가 투쟁에 나서야 하지만, 그 투쟁만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많은 사람이 공감해야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니, 변화에 대한 필요를 느낀다면 나 하나부터라도, 비록 작은 것일망정 끊임없이 소리를 내는 것이 맞겠다.



끝맺음 (2020.07.27)


지금까지 노력한 대가는 넘치도록 받고 살았다. 하지만 노력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와 그로 인해 다른 이가 입었을 피해는 아직 헤아리지 조차 못했다. 끝맺음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차별금지 (2020.07.27)


“나와 다르다, 내 신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걸 금지하자는데, “나와 다르다, 내 신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부패와 무능 (2020.07.28)


예전에는 썩었지만 유능한 쪽을 고를 것인지 무능하지만 깨끗한 쪽을 고를 것인지 고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제 밑천이 드러나 모두가 무능하고 게다가 모두가 썩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고 보니 불쌍한 건 백성뿐이라.


야당이 위상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망가졌다. 이참에 아주 온전히 무너져 내려서 폐허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고치는 것보다 훨씬 빠른 길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야당이 지리멸렬하는 모습은 격려할 일이지 안타까워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니다.



패거리 (2020.07.29)


보수나 진보는 지향하는 곳을 향해 걷는 길이 다를 뿐, 옳은 것을 지향한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옳은 것을 향해 걷지 않는다면 그건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될 수 없다. 그저 자기 밥그릇에 눈먼 패거리에 불과하다 하겠다.



처가 (2020.07.31)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내 처가는 좀 번성한 집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주워들은 건 있어서 처가 덕은 보지 않고 살겠노라고 흰소리를 하는데, 아버지가 쓸쓸하게 웃으시면서 “정말 지푸라기 하나만 붙들어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을 때, 그 지푸라기 하나가 없어서 힘겨웠다”고 하셨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혈혈단신 상경한 젊은이가 혼자 월남한 같은 처지의 아내를 만났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가진 것이라고는 초등교육 몇 년이 전부였던 아버지. 오늘 스물세 번째 기일을 맞았다. 이번엔 자식이라도 대신 참여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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