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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6. 2021

불량 판결문

불량 법원

최정규

블랙피쉬

2021년 5월


상식과 맞지 않는 법


송사에 기둥뿌리 빠진다는 옛말이 있다. 그래서 송사는 피해야 할 일인 줄 알고 살았다. 변호사 말고 송사를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한 세상 일 아닌가. 어쩌다보니 회사 일로 몇 차례 소송 당사자가 되었다. 당사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을 설명하고 필요한 자료를 만들었을 뿐 소송을 진행하는 건 법무 담당자와 변호사여서 법정 출두는 고사하고 법원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다. 그러니 소송에 대한 내 생각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모두 검사나 판사가 되고 변호사는 검사나 판사가 퇴직하고 나서 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사법시험 합격자 중에서 판사나 검사가 되는 경우는 반이 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것에 대해 ‘특별히’ 무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일반인들이 아는 그만그만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0년 넘게 변호사로 일해오고 있다. 그는 책에서 스스로를 ‘상식과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책의 상당 부분을 법원과 그 구성원을 비판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법이 상식과 맞지 않으며, 그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사법제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가 보기에도 법이 그렇게 문제가 있고 또한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불친절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하다면, 그곳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일반인들은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인가. 송사에 기둥뿌리 빠진다는 옛말이 허사가 아니라는 말이지 않는가.


법은 해석


저자는 법의 영역에서는 수학공식과 같은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법은 해석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니라 법 해석을 잘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말이니, 결국 법이 정의일 것이라고 믿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으로 들린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혹시 부분을 너무 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저자가 지적해내는 문제를 하나둘 따라가면서 어쩌면 그것이 일부가 아닌 전체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서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어느 교수의 주장을 한동안 관심 있게 살펴본 일이 있다. 학자의 주장에 시비가 걸리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고 학문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까닭으로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던 이들은 기어코 그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그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저서와 소송과정을 살펴보면서 학문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가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1심 무죄 판결과 2심 유죄 판결의 근거가 모두 대법원 판례였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판사들이 판례에 의존하는 것을 두고 기득권의 논리를 따른다고 질타하며 판례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판단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법은 해석의 문제라는 저자의 견해와, 판례를 근거로 누구는 유죄를 선고하고 누구는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와, 판례에 얽히지 말라는 저자의 요구를 지켜보면서 법은 법조인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정작 법의 결정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의 처지와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법은 상식의 최소한’이라는 말은 법은 상식의 범위 안에서 작동해야 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작동하는 구조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 법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는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바가 더 자주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변호사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자기를 변호할 수 없다면 과연 그것의 법의 정신에 맞는 일일까 모르겠다.


힘없는 이들이 받는 불이익


저자는 불량판결문의 사례로 판결의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소액재판을 들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판결문에 이유가 빠져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마 누가 이유도 밝히지 않고 소송이 기각되었다고 했으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민사 재판의 70% 이상이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로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소송가액이 3천만 원 이하일 경우 소액사건심판법에서 판결 이유를 생략해도 된다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2019년 민사소송 94만 건 중 68만 건이 소액재판으로 분류)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대부분의 사건이 소액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소송을 제기한 대다수가 재판의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이유조차 모른 채 판결문을 받아들어야 하며, 그래서 항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도 업무이니 효율을 생각할 수 있고 효율 때문에 일부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것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아닌가.


지난 10년 동안 산업재해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0.5%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명에는 눈을 의심했다. 평생 현장에서 또 현장과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산업재해를 당한 경우를 적지 않게 봤지만 가벼운 부상을 산업재해로 여기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재해를 당한 이들은 완치되기까지 상당한 고통과 세월을 감내해야 하고, 후유장애로 영영 원래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이들에게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 중에 고작 0.5%가 실형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80년대 초반에 거제도 터널공사 현장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터널을 뚫고 보강하는데 물이 필요하고 공사하는 도중에 터널 안으로 지하수가 유입되어서 터널 안에는 늘 물이 고인다. 터널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은 모두 전기를 사용하는데, 그러다 보니 누전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누전차단기를 설치한다. 그런데도 누전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누전차단기를 작동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누전차단기를 작동시키면 누전될 때 전기가 자동적으로 차단되어 작업이 중단되는데 그것을 손해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누전이 일어났을 때마다 사고가 나는 것도 아니고 사망사고가 나도 보상금 3천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쪽에는 목숨이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효율이 걸려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일인가. 산업재해에 대해 실형으로 책임을 물었더라면 결코 비교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힘없는 이들이 효율이라는 이름에 치어 판결 사유조차 알지 못하고 때로는 산업재해를 당해도 벌금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지금의 사법체계는 저자가 말한 ‘불량판결문’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


처벌을 무력화하는 장치


심신미약ㆍ주취감경ㆍ촉법소년ㆍ공소시효. 사실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어리다는 이유로,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피의자들이 받아야 할 처벌을 줄여주거나 무력화하는 장치들이다. 저자는 조항을 악용하려는 사람이 문제일 뿐이지 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특히 소년범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는 더욱 분명한 의견을 개진한다. 소년법이란 소년을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호해서 사회로 돌려놓을 것인가를 다루는 법인데 소년범을 행한 엄벌주의가 과연 궁극적인 해결방안인지 묻는다. 그리고 소년범의 엄중처벌과 관련한 국민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을 인용한다.


“대다수 전문가가 소년범에 대한 처벌 강화가 소년의 재범률을 낮추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라고 지적했고, 소년범 연령을 낮추는 것이 범죄 감소로 이어졌다는 사례도 찾을 수 없었다. 소년범 연령을 15세에서 14세로 하향조정한 덴마크는 재범률이 오히려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나 이를 다시 환원시켰다. 연령 하향조정을 검토하는 우리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UN 아동인권위원회에서도 이를 낮추지 말 것을 권고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동일한 의견을 표명했다.”


소년범의 처벌을 강화한다고 재범률이 낮아지지 않았다는 말도 알겠고 소년범 연령을 낮추니 오히려 재범률이 늘더라는 말도 알겠다. 다 좋다.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그렇다면 소년범의 연령을 더 높이거나 처벌을 완화하라는 말인가? 벌을 덜 받으면 범죄에 대한 유인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 상식일 텐데, 상식의 최소한이라는 법에서는 왜 그럴 때 상식과 다른 결론이 도출되는 지도 모르겠다.


주취감경은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고, 심신미약도 취지대로 운영이 되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공소시효이다. 찾아보니 공소시효를 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나 진술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재판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시간이 흐르면 감정이 진정되므로 처벌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처벌은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셋째, 그 많은 미제사건들을 관리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과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


기억이나 진술의 정확성은 수사기법의 발전으로 상당 부분 개선되었고, 시간이 흐르면 감정이 진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처벌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지 알 수가 없고, 효율과 비용이 정의를 앞선다는 주장은 괴이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적어도 피해자가 있는 사건은 공소시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당국에서 공소시효를 차츰 없애나갈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없앨 조건을 찾는 게 아니라 남길 조건을 찾는 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은 일부 주를 제외하면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없고, 영국은 경범죄에만 공소시효를 적용할 뿐 원칙적으로 공소시효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은 2010년 살인 등 중대 범죄 12가지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했다지 않는가.


Whistle Blower


저자는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법관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이라 판단될 경우 그 내용을 고스란히 언론사에 제보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다. 존중받아야 하는 건 법원 판결의 내용이지 법원의 불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그 행동이 지나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앞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결코 눈감으려 하지 않는다. 나부터 눈 감기 시작하면 법원의 무례와 불친절을 계속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고 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다. 제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해결책이 있었으면 벌써 적용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대안 없는 문제만 제기하는 그의 무책임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 당할 불이익 때문에 지적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의 존재는 휘슬블로우어(Whistle Blower) 역할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문제를 삼아야 문제가 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무모해보일 수 있는 그의 비판이 낙숫물이 되어 결코 파이지 않을 것 같은 바위를 뚫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저자가 알려준 매우 유용한 팁 하나. 이 팁을 제대로 쓸 수 있으면 좋겠고, 쓸 일이 생기지 않으면 더욱 좋겠다.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재판 당사자가 녹음 또는 속기를 신청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가사소송법과 행정소송법은 민사소송법을 준용하니 민사ㆍ형사ㆍ가사ㆍ행정 재판 모두 신청하면 녹음이나 속기할 수 있다. 판사의 막말과 부당함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렇게 말해 좋을 게 없으니 그저 ‘판사님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텐데 제가 잘 이해하고 기억하지 못할까봐 걱정되어 나중에 다시 듣기 위해서 신청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녹음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걸 유용한 팁이라고 여길 만큼 법원의 무례와 그 때문에 겪는 수모는 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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