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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6. 2021

어쩌면 스무 번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

편혜영

문학동네

2021년 3월


호텔 창문


정민이라는 젊은이가 한강 공원에서 친구와 술 마시다 물에 빠져 사망한 일 때문에 아직도 소란스럽다. 듣자 하니 같이 술 마시다가 먼저 귀가한 친구 A군에게 살인혐의가 덧씌워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 TV에서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한 것이 방송되었다. 정민 군이 취기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물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추론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방송 말미에 혐의를 받는 A군의 아버지에게 왜 그런 오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이 죽었는데. 자식을 잃은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나.” 그래서 오해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내 자식이 살인혐의를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당하지만, 그렇더라도 상대는 자식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이 오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 때문에 자기 자식이 살아났다면 어땠을까? 자기 자식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데도 그로 인해 겪었을 아픔을 생각해서 사실조차도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그 죽음이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아마 죄인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친구 때문에 목숨을 건진 청년은, 그리고 그 가족은 얼마나 오랫동안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난 연말 독서 팟캐스트 방송에서 백온유의 <유원>을 들었다. 십여 년 전 비극적인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열여덟 살 주인공 ‘유원’이 그날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떠난 언니와 11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 내느라 몸도 삶도 망가져 버린 아저씨와의 관계 속에서 겪는 상처와 윤리의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가족을 향한 부채감.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은 은혜를 입은 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언제까지 거기에 묶여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 때문에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외면하며 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운오를 구하고 사촌형 운규는 죽는다. 운규의 부모인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제사 때 운오가 참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조금이라도 소홀하다 싶으면 점잖게 또는 대놓고 추궁한다. 제사에 가려고 내려왔던 운오는 근처에서 일어난 불구경하느라, 그러다가 만난 운규의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제사를 놓친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유원>을 읽지 않았으니 유원이 내내 죄책감과 부채감에 매어 살았는지 끝내는 풀려났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편혜영은 운오를 더 이상 그런 죄책감과 부채감에 묶어 놓지 않고 그 굴레에서 풀어주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공교롭게도 정민 군 사건에서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오해를 감수했던 A군의 부모는 숫자가 얼마가 되었던 무책임하게 루머를 퍼트리고 살인범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모두 형사고발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고발이 루머를 퍼트린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향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부채감은 부채감으로 놔둬야 할 일이고, 자식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 굴레에 묶여 있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선언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 번 읽어서는 알 수 없는 작가의 의도


편혜영은 <호텔 창문>에서 운오의 심리상황과 함께 운규 친구가 겪었던 화재사건을 병치하고 있다. 운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장치였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스무 번>에 실린 편혜영의 단편소설은 독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글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단편의 특성인지 작가의 문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고도 끝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작품이 더 많다.


조해진의 단편을 읽으면서 장편이 줄거리를 일러주는 동영상이라면 단편은 프레임 바깥 상황을 상상하게 만드는 스틸 사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편혜영의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프레임 바깥 상황을 상상으로 채워 넣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노력한다고 익숙해질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당분간 장편을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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