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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31. 2021

환한 숨

Novel 그리고 Short Story

조해진

문학과 지성사

2021년 3월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만큼은 읽었던 소설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문학의 주류로 떠오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소설’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그저 두서없는 이야기로 비친 그 소설에 더해지는 평론가의 비평이나 작가의 변은 마치 외계어와 다를 바 없이 생소했다. 몇 번을 읽어봐도 작가와 평론가가 애써 설명한 부분이 어디인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문학 방송에 이끌려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저 그랬다. 여전히 줄거리는 두서없었고 거기에 더해지는 평론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을 읽었다. 읽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짜임새 있는 내용도 좋았지만, 모처럼 내가 작중인물이 되어 각각의 시선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소설 한 편으로 여러 사람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조해진의 소설을 모두 목록에 올려놓고 최근 발표작부터 거꾸로 읽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어든 것이 공교롭게 단편집이었다. 처음 한두 편 읽으면서 장편을 몇 편 더 읽어봤으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작가의 글인데 장편과 단편은 내게 그렇게 달랐다. 그러면서 비로소 장편소설(novel)과 단편소설(short story)에 대한 영어단어가 같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환한 숨>을 읽으면서 장편이 동영상이라면 단편은 스틸 사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동영상은 그저 줄거리를 따라가면 상황을 알 수 있지만 스틸 사진은 정지된 화면에서 상황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아 좋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정지된 화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후자에 속한 내게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평론은 난수표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나 조해진의 장편을 몇 편 더 읽고 그의 문법에 조금 더 익숙해지고 나면 그런 생각이 좀 덜어지려는지 모르겠지만.


아홉 편으로 이루어진 그의 단편집은 모두 조도 낮은 무채색이었다. 주인공은 하나 같이 변방사람들이었으며, 세상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친구를 돌보는 간병인(환한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재계약에 실패한 계약직 교직원(흩어지는 구름)과 기간제 교사(하나의 숨), 언론인 해직 당시 채용된 신입기자(경계선 사이로), 추락한 예술가와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어린 노동자(파종하는 밤), 장기 파업으로 백수나 다름없던 계약직 PD(눈 속의 사람), 성추행으로 잠적한 아버지 때문에 고통당하는 두 자매(높고 느린 용서), 소아 때부터 항암치료를 받던 가난한 젊은 시인(숨결보다 뜨거운),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둘째(문래)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조해진은 누구를 독자로 상정하고 이 소설을 썼을까? 작중인물과 같은 변방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이 소설을 다른 세상 이야기쯤으로 여길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이 소설에 매료되고 공감을 표시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여길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그들과 같은 변방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문단의 주목을 받고 많은 독자를 거느린 조해진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작품을 얼마쯤 더 읽으면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궁금한 것투성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연 그 궁금증이 한 때 조도 낮은 무채색 시절을 살아왔던, 그래서 다시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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