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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30. 2021

일본의 굴레

일본의 빛과 그늘

태가트 머피

윤영수ㆍ박경환 옮김

글항아리

2021년 4월


과거사 사과는 요원한 일인가?


작년에는 연초에 읽은 글 하나 때문에 한 해 꼬박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기는 했지만 관련 자료를 읽어갈수록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아마 거기에는 독일의 사례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신뢰할만한 분들의 적극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저자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 더 나아가 강제지배에 대해 사과한 것으로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에 관심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은 결코 사과한 일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패전 이후 일본인들이 과거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자체를 미군사령부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미군사령부는 의도적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지시하기도 했는데, 저자는 이것을 두고 미국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들쳐 낼 경우 자신들 역시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도쿄 전범재판을 미국이 ‘승자적 정의’를 들이댄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졌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니, 일본으로서는 자기들의 행위가 죄라고 여길 이유가 없고 따라서 사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히로시마는 중요한 해군기지이고 오랫동안 일본 군사시설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수 있을지라도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가사키 폭격은 불필요한 잔혹행위일 뿐이었다. 일반 국민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쓰던 가장 흔한 말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가당착에 발목 잡힌 미군사령부가 과거사를 돌아보는 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국민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의 원인을 되돌아보고 재발 방지를 위한 논의에 참여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 4장 경제기적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독일은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독일의 사과를 진심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독일이 자기들의 행위가 분명히 범죄였으며 그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는 제도로 그 사과를 뒷받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독일과 일본의 이런 차이는 왜 일어난 것일까? 저자는 일본의 사과는 필연적으로 일본 체제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일본인들은 대체로 자기 책임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감당하려 든다고 말한다. 문제를 일으키고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호사 뒤에 숨어 책임회피에 급급한 서구 사람들과는 다른 매우 훌륭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책임이 자기 조직에게 돌아갈 경우 절대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저자는 일본의 조직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발생하는 문제를 직시하는데 유난히 서툴고, 그로 인해 실패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정통성의 중심인 천황과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정신적 자살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에게 사과를 기대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더구나 오늘날 아베를 위시한 일본 권력자들의 상당수가 1930년대 일본을 재앙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의 (유전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기대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에서 언급하겠지만, 일본이 사과를 하기 어려운 데는 메이지 이후부터 정권의 정치적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졌다는 구조적 결함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결함은 현재까지 메워지지 않고 있다. 결국 과거사 사과는 내 생애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이 책의 추천서문에서 주진형은 일본의 행위 중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로 ‘자살행위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것’을 꼽고 있다. 그동안 태평양전쟁에 대해 여러 책을 읽어봤지만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주진형의 지적대로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든 것인지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패배할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한다. 세상에 그런 미친 짓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저자는 당시 일본의 정치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메이지 지도자들이 사라진 이후로 일본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통치권을 가졌던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권력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판단할만한 제도나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관료들이 스스로 정치 위에 군림한다고 믿을 정도로 힘이 커지다 보니 어느 권력 집단도 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힘이 사방으로 나뉘어 있고 어느 힘도 다른 힘을 통제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설사 구심점이 있다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기관이 아니니 책임소재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각종 이익집단이나 외국의 압력에도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고위 관료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전쟁 전 관료들과 같다는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천황의 신하였고 요즘은 일본의 신하일 뿐이지 유권자들의 공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선거로 뽑은 더럽고 욕심 많은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들이 섬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명목상의 상관들이 결정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 11장 일본과 세계


저자는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 바로 이런 제도나 절차의 부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지도자들이 스스로 대담한 도박을 벌인 게 아니라 자기 역시 전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고 느낄 정도로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최고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부하들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에 지나지 않았고, 부하들은 해외에 복무하는 장교들이나 군부와 얽혀 있는 주인 없는 사무라이들이나 무뢰배들에 의해 조종당했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죽고 나서 일어난 군부 내의 권력 투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격렬해졌다. 해군과 육군이 정부 정책은 물론 정부 내각 구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려 들었고 서로 끊임없이 대립했으나 정부 관료들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군부는 ‘천황의 뜻’을 앞세워 마음대로 군사적 결정을 내렸다. 이런 와중에 중국에서 끝도 없는 지상전을 펼치며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전투를 이기고 아무리 많은 땅을 잠시 점령해도 적은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 일본은 미국을 직접 공습할 것을 승인하고 만다. 그것을 기획한 사람들도 그것이 종국에는 자살과 마찬가지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 3장 메이지유신에서 미군정기(美軍政期)까지


결국 권력이 집중되어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커질 대로 커진 권력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되었다는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도 일본에서는 명목상의 직위와 실제권력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한다. 결국 권력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분명하다면서 권력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전복시킬 수 있겠는지 묻는다.


일본의 외교는 오직 미국을 겨냥한 것인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의 문화는 일본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과 함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시선은 서구로 향했다. 그동안 문화와 기술의 종주국으로 여기고 있던 중국이 서구인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서 그때까지 속해 있던 문화적 그룹에서 벗어나 서구국가들 사이에서 자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리고 무기력한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와는 태생부터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스스로와 서방에게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의 합병은 불가피한 것이었을 뿐 논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들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를 모델로 삼았고 런던에서 차관을 받아 철도를 건설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일본은 스스로 아시아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는 헌법을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 정통성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히로히토 천황을 권력과는 무관한 딴 세상 사람이라는 허구의 존재로 존속시켰다. 이후로 일본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 피보호국으로 그 존재를 유지해왔다. 국내 정치를 수행할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지만 중요한 모든 외교ㆍ안보정책과 체제를 변화시킬 만한 중요한 경제정책도 미국의 뜻을 따라야 했다.


전후 보수파 관료들은 기존에 유지되어오던 미국과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중국의 영향력에 압도당해 일본이 언젠가는 버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의 통제권에 들어가느니 미국의 비위를 계속 맞추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일본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시스템을 공들여 건설했다. 저자는 이러한 대미 일변도의 일본 외교정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1980년대 말 이후에는 미국의 품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사실상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자민당이나 관료 뿐 아니라 기성 재계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층의 상당수도 주권의 핵심부분을 미국에 맡기는 것이 자기들이 국내 상황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타당한 대가로 여긴다고 말한다.


물론 미국은 일본을 동맹으로 여긴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이번에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은 스가 총리와 가진 정상회담에서 다시 한 번 미일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저자는 “일본은 미국의 동맹이 아니고 한 번도 동맹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피지배국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니, 그러고 보면 아베가 왜 그렇게 트럼프에게 굽실거렸는지 이해할만 하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지속가능한가?


일본 경제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연공서열식 종신고용제가 먼저 떠오른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것은 꿈같은 제도였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런 생각으로 일했고, 후배들에게 그런 생각으로 일하기를 요구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이 바람직한 제도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당시 내가 그것을 꿈같은 제도로 여겼던 까닭은 저자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 기업의 관리자들은 회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존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단기 이익의 창출은 무차적인 것으로 우연의 산물이거나 심지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개별 관리자의 보수나 회사에서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도 아니었다. 관리자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것은 회사가 핵심 직원들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얼마나 공헌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기업은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데 그들은 이익 창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원리에 벗어난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해서는 기업이 존속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런 기업을 존속시키자니 원리에 어긋난 정책과 제도로 이를 떠받들어야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기업 간의 모든 경쟁을 통제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회사들도 고용 안정성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어 가격과 공급에 관한 비공식적인 합의를 조율하고 감시했다고 설명한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불법이었지만 그 덕에 일본은 경쟁력 약한 기업들도 고용안정성을 지키고, 경쟁제품의 수입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었고, 그것이 고도성장의 기틀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도가 언제까지나 존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연공서열식 종신고용제를 감당할 재정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고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평생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전적으로 회사에 매어 사는 그런 인생을 더 이상 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도 별다른 전문성도 없는 사람에게 안정을 보장해주고 봉급을 꼬박꼬박 올려줄 회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일본 기업들은 비용절감 압박이 거세지자 정규직 채용을 중단하고 비정규직을 뽑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급여가 훨씬 적은 비정규직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사회 전반에 걸친 구매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저자는 전후 일본의 부흥은 기적이라고 일컬어졌지만 일본 국내외를 막론하고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일본이 어떻게 이런 변화를 이루어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게는 저자의 이런 지적이 “왜 그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그동안 작동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들린다. 그동안 그런 시스템이 작동되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니 말이다.


저자는 일본의 비즈니스가 세계화에 뒤쳐져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해  저자가 밝힌 자신의 견해나 인용한 의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회사의 전략이나 의사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본식 협업방식과 일처리방식을 고집하고 일본인 동료와 원래 방식대로 빨리 처리하는 걸 선호한다.


둘째, 실패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상호의존관계나 의무 또는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나 조직을 배신하기보다는 ‘주주 가치’나 ‘공공의 선’ 같은 추상적인 원칙을 위반하는 쪽을 택한다.


셋째, 권력구조나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서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넷째, 기득권층이 비록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자기 계층의 지위와 특권을 지키기 위해 단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놀라운 통찰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일본을 방문했던 저자 태가트 머피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사십 여년을 머무르며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로 일한 미국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의 역사ㆍ사회ㆍ정치ㆍ경제를 두루 다루고 있다. 누구든 오래 살았다고 그 나라를 다 아는 건 아니다. 그가 이런 통찰을 보일 수 있는 데는 투자전문가ㆍ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ㆍ국제경제학 교수로 일한 그의 경력이 크게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넓고 깊은 이해를 가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놀라운 통찰은 좋은 번역자를 만나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번역이란 저자의 주장을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시 쓰는 작업이다. 단순히 원어를 한국어로 바꿔놓았다고 번역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번역자는 먼저 독자로서 이 책을 만난다. 그리고 일본에 오래 살면서 가졌던 의문과 궁금증을 이 책을 만나 단숨에 풀 수 있었다면서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없이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책을 주변 사람들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번역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 덕에 나 또한 그동안 일본에 대해 가졌던 궁금증을 풀 수 있었고,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은 선명하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바르게 알아갈 수 있었다.


번역자는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어서 현 시점과 차이가 있는 부분은 추가 자료나 설명을 주석으로 달아놓았고, 의아하거나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은 저자에게 수시로 확인해 정확성을 한층 더 높였다고 했다. 원서를 보지 않았으니 원문의 표현을 얼마나 살렸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봐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독자가 읽고 바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우리말로 풀어냈다. 번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와 그가 곳곳에 달아놓은 주석을 보면서, 그리고 물 흐르듯 읽힐 수 있도록 만든 결과물을 보면서 틀림없이 저서의 취지와 느낌을 원문 그대로 전달했을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십 수 년 전에 천여 쪽이 넘는 전문서적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 대한 책이니 남들보다 이해의 폭이 넓기는 했지만 모든 내용을 알 수는 없는 일이어서 번역하다 숱하게 많은 곳에서 멈춰야했다. 책을 찾아보고, 알만한 이를 찾아가 설명을 듣고, 어떤 부분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번역해놓은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매끄럽게 읽어지지 않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고쳤다. 그래서 번역자가 이 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감히 짐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노고에 감사드린다.


번역자도 말했듯이 내용 중에 당장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틀리지 않을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권력이 집중되어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커질 대로 커진 권력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된 것이 문제였다고 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등골이 서늘했다. 바로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고, 그 결과가 ‘자살행위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수 없이 좋은 조언이 될 텐데. 글쎄 그런 이들이 이 책을 읽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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