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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4. 2021

팩트풀니스

사실을 틀리게 보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에 대하여

한스 로슬링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9년 3월


충격


평생 엔지니어로 살아왔으니 숫자에 대한 감각은 평균 이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그 감각조차 믿지 않고 사실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 때문에라도 숫자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질만하다고 여겼다. 저자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독자에게 세계 각국의 인구와 생활수준에 대해 열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숫자에 자신이 있었으니 적어도 반은 맞힐 줄 알았다. 하지만 답을 확인하면서 그 자신감은 무참히 무너졌다. 맞힌 것이 단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14개국 1만2천여 명의 응답자 가운데 13문제를 모두 맞춘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단 한 명이 12문제를 맞혔다고 했다. 저자는 응답결과를 분석할 때 13문제 중 “앞으로 백 년 동안 평균기온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 마지막 질문은 제외했다. 도저히 틀릴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만 맞힐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보기가 세 개 뿐인 삼지선다형이었으니 정답이 될 확률이 1/3이었는데, 정답률이 이보다 높은 경우는 10%에 지나지 않았고 80%는 이보다 낮았다. 나는 그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평균적인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절대다수의 응답자가 생각보다 훨씬 저조한 결과를 얻었고 나는 그 조차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결과를 얻었어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히 왜 절대다수가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나는 왜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이 일었다.


놀라운 현실


저자는 저소득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되며, 세계 인구의 다수가 사는 국가의 소득은 어느 수준인지, 지난 20년간 극빈층의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오늘날 기대수명은 몇 살인지, 1세 아동의 예방접종률은 얼마인지, 30세 남성은 평균 10년간 학교를 다니는데 같은 나이의 여성은 몇 년이나 학교를 다니는지, 전기보급률은 얼마인지 묻는다.


답을 고르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비롯된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생활수준은 세계 상위권이며, 저개발국가의 소득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고, 인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예외적인 성공사례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도 달랐다. 저소득국가에 사는 사람은 겨우 9%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나라에서의 삶이 그렇게 비참한 것도 아니었다. 저소득국가는 대부분의 응답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에서도 자녀수가 줄어들고 아동사망은 드문 일이 되었으며, 인류의 85%가 선진국에 들어갔고 6%만 개발도상국에 남았으며 나머지 15%는 그 중간 어디쯤 있다는 것이다.


오해의 뿌리


저자는 세계 최고지도자들은 가난에 대해 일반인보다는 많이 알았지만 그것은 언제든 최신 통계를 받아볼 수 있고 조언해줄 수 있는 참모를 곁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일반인 보다 많이 아는 경우는 몇몇 분야에 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답이 무작위로 나왔어야 하는데 결과는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틀린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무지를 뿌리 뽑기 위해 사람들의 지식을 업데이트하는데 매진하지만 곧바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을 알려줘도 다시 기존의 부정적인 세계관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 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자기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관이 잘못되면 내놓는 추측도 잘못되는데, 이는 지식이 낡아서도 아니고 선전선동의 결과도 아니고 가짜 뉴스 탓도 아니며, 단지 각자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그것을 바꾸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특히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라고 질타한다.


우리라고 뭐가 달랐을까. 대한민국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산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는 나아지지 않고 우리만 유독 나아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니 이에 대한 대답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오래 전 북경 출장 때 일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 눈에는 공사 현장만 들어왔다. 모든 게 어설펐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삼십 년은 걸려야 우리를 쫓아오겠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그런 상황을 벗어나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면 중국이 그렇지 않을 이유가 뭔가 싶었다는 말이다. 사우디에 부임할 때만 해도 중국 건설업체는 부실공사의 대명사쯤으로 불렸다. 이제는 어지간한 토목공사는 이미 중국 손아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느끼고 깨달은 것은 그때뿐이었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정보가 나올 때마다 이를 업데이트하는 것보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편견을 지우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과유불급


편견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고, 사실을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잘못된 결정을 이끌어 내서 차별과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벌어지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이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조급한 마음에 주장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과장이 섞여 들어간다. 저자는 이것이 일으키는 폐해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나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다급함 때문에 도로를 폐쇄하는 바람에 부녀자들과 어부를 익사하게 만든 경험이 있다. 두려움에 다급함이 더해지면 어리석고 극적인 결정을 내려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긴다. 나는 과장을 좋아하지 않는데, 과장은 근거가 분명한 데이터조차도 믿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성이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배제한 채 최악의 시나리오만 제시하는 걸 반대한다. 미래는 항상 어느 정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그 정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극적인 추정치를 골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확실하다는 듯 제시해서는 안 된다. 최선의 가능성과 최악의 가능성이 있을 때 예상은 그 중간 정도로 하고 여러 가능성의 범위를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근삿값을 제시할 때는 불리한 쪽을 제시하는 게 좋다. 그래야 평판을 지키고 내 말을 무시할 빌미를 주지 않는다.”


“기후변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 중에 ‘기후난민’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시도는 매우 우려스럽다. 기후변화와 이주의 관계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대단히, 대단히 미약하다. ‘기후난민’이라는 용어는 난민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사람들이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더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너무 자주 외치면 오히려 환경운동 전체가 위험해진다. 기후변화 같은 중대한 문제를 다룰 때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전쟁이나 무력충돌 또는 가난과 이주를 이야기할 때 기후변화의 영향을 과장하면 다른 주요 원인을 간과하게 되어 올바른 대책을 취하기 어렵다. 누구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뢰가 없으면 길을 잃고 만다.”


내게는 저자의 이 말이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수많은 의도적인 과장과 편향된 시선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는 걸 보다 못해 토해낸 신음으로 들린다. 환경을 팔아 자기 의도를 달성한 이들이 우리 사회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저자는 후쿠시마 사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2011년 후쿠시마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1만8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이 침수되자 전 세계는 방사능 오염공포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최대한 후쿠시마를 탈출했지만 이후 1천6백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을 피해 도망쳤지만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1천6백 명은 탈출과정 또는 탈출 후에 사망했다. 이들은 대개 노인이었고, 피난 그 자체나 대피소의 삶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가 사망원인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였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도 사람들은 사망률이 크게 증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예상을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나는 사회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의도적인 과장과 편견이 없어지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선의로 세워진 조직’이다. 비록 문제를 해결하자는 선의로 조직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조직은 생물이어서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이어나가려는 속성이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 아닌가. 에볼라 퇴치를 위해 만들어진 기구는 에볼라 퇴치가 목표이고, 목표를 이루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구의 존속을 위해서 에볼라가 퇴치되지 말아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일어나고, 그래서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마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도 같이.


저자 역시 이 문제를 의식한 것 같기는 한데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인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지 하는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풀지 못한 궁금증


저자는 <줄어드는 나쁜 것 16가지>와 <늘어나는 좋은 것 16가지>를 그래프로 보여주며 세상이 어떻게 얼마나 나아졌는지 설명한다. 노예ㆍ선박의 유류누출ㆍ아동노동ㆍ아동사망ㆍ전쟁사망ㆍ재난사망ㆍ굶주림ㆍ매연ㆍ사형이 줄어들고 여성 투표권ㆍ문맹탈출ㆍ자연보호구역ㆍ곡물작황ㆍ전기보급ㆍ상수도보급ㆍ예방접종ㆍ여학생ㆍ통신시설이 늘어났다. 이것만 보면 세상은 분명히 좋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전체를 대표하는 지표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지표가 또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저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조심스럽다.


저자는 전 세계를 휩쓰는 유행병ㆍ금융위기ㆍ세계대전ㆍ기후변화ㆍ극도의 빈곤을 크게 염려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인간의 발전을 수 년 또는 수십 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 전반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 많은 이들의 삶이 놀랍도록 향상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빈곤 역시 놀라운 속도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섯 가지 염려 중에서도 특히 ‘극도의 빈곤’을 우려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물론 저자는 독자가 오해하지 않도록 (비록 그 어느 때보다 극빈층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8억 인구가 빈곤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계 모든 국가의 생활환경이 향상되고 있다면 ‘극도의 빈곤’은 적어도 ‘가장 걱정되는 문제’에서는 빠져야 하는 게 아닐까?


나가며


사우디에서 한국인의 위상은 매우 높다. 때로는 과대평가된 느낌마더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단지 경제수준이 우리보다 낮다는 이유로 그런 나라 사람들의 가치와 존재를 과소평가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마 그동안 내가 가져왔던 이러한 편견이 저자의 13개 질문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책 첫머리에 올려놓은 13개 질문과 그에 응답한 형태를 하나씩 살펴가며 우리의 편견과 무지와 오류를 지적해 나간다. 덕분에 많은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하지만 저자는 ‘틀린 사실’을 바로잡는 것보다는 ‘사실을 틀리게 보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을 바로잡으려는데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독자로서 나 역시 그러한 저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주 저자인 한스 로슬링은 2016년 2월 5일 췌장암 진단을 받는다. 잘해야 2-3개월, 고통을 완화하는 일시적 치료가 크게 성공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2017년 2월 2일,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자 한스는 메모를 적어 넣은 초고를 들고 구급차에 오른다. 그리고 닷새 뒤 이른 시각에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 책을 마무리한 저자의 노고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저자의 사망 기록을 소환한 것은 저자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이제는 별이 된 수많은 지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췌장암이 정복될 날이 오기는 할까 모르겠다.


써놓고 나니 뜬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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