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Jun 15. 2021

별것 아닌 선의

저자에게 건네는 글

이소영

어크로스

2021년 6월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저자의 글에서 ‘6강당’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건물이 몇 개 없을 때 건물마다 번호를 붙였는데, 당시 유일한 강당이 6건물에 있었다. 암호 같은, 하지만 단번에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그 말 때문에 저자와 인연이 닿았다.


간혹 연구하는 내용에 대해 쓴 글도 있지만 그의 글은 대체로 일상에 머물렀고 소박하고 따뜻했다. 특별히 눈길을 끌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건너뛰기도 했다. 어느 날 신문에 쓴 칼럼이 올라왔다. 첫 번째 칼럼을 읽고서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학교수로서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한 것이 아니라 여느 때처럼 마음을 따라 쓴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 출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치열하고 심각한 사회 현안이 하루를 멀다하고 신문 지면을 뒤덮고 있는데 내 글 하나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고 했는데, 아마 내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저자 스스로 밝힌 것처럼 ‘별것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고, 지금까지 잘 이어왔고, 이렇게 <별것 아닌 선의>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한동안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깊이 관심을 두었다. 법적인 문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몇 가지 쟁점에 대해 그의 견해를 물은 일이 있었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질문이라 결례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의 글에 비친 심성으로 미루어 질문을 야박하게 내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 중이어서 메시지를 늦게 읽었노라며 찬찬히 읽고 답을 해도 괜찮겠는지 물어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가 쓴 칼럼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모른다.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어떤 어둠으로 다시 돌아갈까 두렵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품에 안아 험한 고비를 건네주셨으면 좋겠다고 고백할 만큼 절박하다고 했다. 그리고 힘과 위로를 받아 마침내 두 발이 닿게 될 그곳이 지상이기를, 그래서 그 단단한 땅을 딛고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후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가슴앓이를 그의 공간에 털어놓았다. 사실 그동안 그가 써온 글이 소박하고 따뜻하기는 했지만 늘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고 언뜻언뜻 아픔과 고통이 비치기도 했다. 혹시 내가 과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간에 비쳤던 그늘의 시선으로 읽었을 때 그의 글이 더 선명해지는 걸 보면서 짐작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백을 듣고 돌이켜보니 그렇게 꼭꼭 여몄으나 그럼에도 온전히 감출 수 없던 내밀한 고통을 이제는 모두 내어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는 책에서 시종일관 ‘별것 아닌 한 마디’가 누구에겐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자기 기억을 풀어낸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나 역시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되돌아보니 뜻밖에도 악의 없이 내던진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를 겨누는 비수로 되돌아와 애써 얻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 먼저 떠올랐다. 그보다 오래 살았으니 허물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자비가 자기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특별히 자비롭거나 선하지 않은 한 인간이 건넨 <별것 아닌 선의>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건네진 선의가 별것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라 별것 아닌 선의조차도 누군가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찰나의 선의는 설령 위선일지라도 그 자체로 귀하다고 말한다. 선의 하나가 더해진 세상은 그것마저 없는 세상에 비해 그만큼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나누어진 모든 자비를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초조해 하는 자기를 위해 없던 보충수업을 자청한 학원 교무주임 선생님의 배려와, 제자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팔불출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으셨던 지도교수님 격려와, 연하장의 쓸모를 생각해 굳이 비싼 특급으로 보낼 필요 없다고 설명해준 우체국 직원의 친절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사들고 찾아온 학생을 통해 도둑처럼 찾아온 위로 앞에서 손윗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아이처럼 운다.


그런 그가 받기만 했을까. 지도하는 학생의 어두운 표정을 놓치지 않고 듣는 귀가 되어준 것을 기뻐했고,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가 수능을 앞둔 학생이 함께 절에 가기를 청하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서 부처님께 배례하고, 그 모습을 좋아라 하는 학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모두 용서하셨을 거라고 의심 없이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유학생활 가운데 자기 생일을 위해 주머니를 털었던 친구에게 맛있게 먹고 밝아진 표정 대신 값싼 메뉴를 고집하는 것으로 보답하려 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당시 자기가 표현해야 했던 것은 친구가 지불한 시간과 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그것을 아끼지 않은 마음에 대한 고마움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모습은 그의 따뜻한 심성에서 배어나왔을 것이다.


오래 전 열반에 든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를 남기셨다. 산은 내게도 산이고 물은 내게도 물이겠지만, 그 산과 그 물이 깨달은 자의 눈에 비치는 산과 물일 수는 없는 일이다. <별것 아닌 선의>에 감사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감사가 일상인 사람의 감사와 마음이 부서지던 순간, 생을 그만두고 싶던 과거 어느 순간, 가족과 절연하며 살아온 긴 시간을 돌고 돌아와 드리는 감사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처음 찍었다는 그의 인터뷰 영상을 몇 번 돌려보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일에 조심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를 그저 연차 높은 대학원생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깊었고 그의 모습에는 품위까지 실려 있었다.


그런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그에게, 무엇보다 내 보배와 같은 두 손녀를 이름으로 기억해주는 그에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팩트풀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