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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7. 2021

새엄마 육아일기

育兒日記 아닌 育我日記

오진영

눌민

2021년 5월     


잠재의식     


얼마 전 설교 중에 목사 내외분이 입양한 아이들과 함께 나와 입양과 양육과정에서 체험한 은혜를 간증하는 영상을 본 일이 있다. 입양은 귀한 일이고 그 체험을 나누는 것 역시 귀기울일만한 일이지만, 입양된 아이들이 공개적인 자리에 함께 나오는 모습이 몹시 불편했다. 물론 본인이 싫다는데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마흔 살에 갑자기 여덟 살 아이의 엄마가 된 저자는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며칠 만에 아이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아이에게서 “엄마 사랑해요”라는 글씨를 수놓은 수건을 건네받고 너무 기특하고 예뻐서 사방팔방에 자랑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었을 당시에는 아이가 한 일이 기특하고 예뻐서 주위에 자랑도 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들은 나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했던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친엄마라면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런 애교를 떨 필요는 없었을 텐데. 새엄마한데 잘 보이고 싶어서 손에 익숙지 않은 바늘과 실로 천에 글자를 한 땀 한 땀 놓았을 심정이 상상이 되어 마음이 아팠다.” 


아마 그게 아이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본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어렵게 되찾은 엄마의 사랑을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잠재의식이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에서 주인공인 입양아 나나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양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만, 그러나 이미 가슴에 새겨진 ‘버려진 기억’ 때문에 양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양부모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떼쓴 적이 없다. 비싼 학용품, 여행, 왁자지껄한 생일파티 같은 것. 몸살 기운이 있어도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잠든 척했고,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 인종차별 섞은 성희롱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외식이라도 하는 날엔 양부모가 고른 것보다 싼 음식을 찾느라 메뉴판을 샅샅이 살폈고, 그들이 선생님에게 불려가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모든 규율에 순종했다.”   

  

그리고 생모를 만나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는지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날 돌봐 준 그분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이를 저자의 경우에 대입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새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익숙지 않은 수를 놓는 아이의 심정이 상상이 되어 마음이 아팠다”고 고백한 것처럼 아이의 잠재의식 어딘가에는 그런 불안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고, 그런 불안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드러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크게 무리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가 본능적으로 알았을 뿐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줄 안다는 건 인생을 사는데 큰 도움이 되는 자산일 것”이라며 그렇게 마음 아파할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 행동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래서 가슴 아파 할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 내면에 드리워있던 그늘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예민한 일이어서 조심하느라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내심을 털어놓자면 굳이 이미 성인이 된 아이의 사진을 책에 넣었어야 했을까 싶다. 물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독자가 저자의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독자 중에 그와 마주칠 이도, 마주친들 알아볼 확률도 매우 낮기는 하지만 자기사진이 실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짐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나는 결국 설교 중에 방영한 그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예배를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일어서야 했고, 목사님께 예배도중에 일어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나도 내가 지나친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모국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     


인류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브라질로 유학 간 저자는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석사 과정을 마치는 것으로 학업을 접는다. 당시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때여서 한국에 돌아오면 얼마든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창피하고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사귀던 교포 친구와 결혼한다. 그리고 1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저자가 브라질에서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기 싫다거나 그와 가족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박사학위 없이 처량하게 돌아오기 싫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평생을 어린애처럼 말하며 사는 일이 박사학위 없는 처량함보다 더한 비극이라는 계산이 서는 순간 브라질은 버려도 되는, 아니 버릴 수밖에 없는 카드가 되었다”며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익히는 능력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완전히 닫히는 창문과 같다고 한다. 브라질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초등학교 3학년 대화 수준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오십 년 육십 년을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들어야 하는 세상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았다. 내 나이 어른이 구사하는 언어로 말하고 듣고 농담도 하고 진지한 주장도 하고 우기고 싶은 말 우기고 반박하고 싶은 말 반박하고 싶었다. 언어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내 모국에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나는 불모의 땅 사우디에서 12년째 살고 있다. 회사의 정책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법인을 설립하고 수고를 기울였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여기서 거둔 성적만 생각하면 돌아가도 벌써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저자가 그랬듯이 “처량하게 돌아가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은퇴를 훌쩍 넘긴 나이가 되도록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돌아갈 날만 기다린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아갈 용기가 생겨서도 아니고 이곳의 삶이 지루해서도 아니다.     


영어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이고 업무 때문에 외국기업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하나둘 주워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언어 수준으로 외국에 나와 사람을 만나 설득하는 일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모른다. 을이 갑을 설득해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우리말로도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그뿐 아니다. 필요한 말은 어떻게든 꾸려지는데 저자 말대로 도무지 “내 나이 어른이 구사하는 언어로 말하고 듣고 농담도 하고 진지한 주장도 하고 우기고 싶은 말 우기고 반박하고 싶은 말을 반박”할 수 없어서 너무 힘겨웠다. 나름 조리 있게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며 말하는 내 자신을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어서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언어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내 모국의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이 그냥 내 말이 되었다.     


필력     


저자의 글은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두 번 읽을 필요 없이 읽으면 읽는 대로 의미가 들어온다. 보고서 쓰는 일이 생업이다 보니 보고서를 읽는 사람이 혼선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인데, 그렇지 못해 매번 좌절하다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나아져 가는 것 같다. 저자는 글을 써놓고 나서 입으로 소리내어가며 읽어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술술 읽힌다는 말이다.    

 

저자는 내 생각보다 꼭 한 발짝 앞서 나간다. 저자의 말에 의문을 품을 만하면 다음 글에서 여지없이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독자의 관점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저자는 그걸 아주 훌륭하게 감당해 낸다.     


평범한 문장 가운데 삶의 지혜를 깨우칠만한 글도 많고 벽에 써 붙여 놓고 음미할 글도 꽤 눈에 띈다. 나도 다 아는 말인데 나는 왜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정말 나도 다 아는 말이었는데 말이다.     


“2학년 때는 2학년 산수를 어려워하던 아들은 3학년이 되니 2학년 산수를 척척 푸는 게 아닌가. 그래. 우리 애는 1년만 기다려주면 되는 거였다. 길고 긴 인생. 남들보다 1년 정도만 천천히 가면 되는 거였다.” 

“결혼을 지속시키는 건 서로 가엾어 하는 마음이다.”     


저자는 어느 날 각 잡고 앉아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동안 그야말로 육아일기를 쓰듯 이 책을 썼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 이야기는 조금씩 줄어들고 아이 때문에 깊어진 생각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어른은 생각 깊은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니, 그래서 이 책은 育兒日記가 아니라 育我日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논골 이웃이기도 한 저자의 저작에 찬탄과 축하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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