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모든 예술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도 자식이 어려움 겪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을 감사했다. 생각해보니 남이야 어찌 되었든 내 자식이 어려움 겪지 않은 걸 감사한 것이 아니냐. 옳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 유명 연예인이 스마트폰 개인정보가 누출되어 크게 망신을 산 일이 있었다. 어느 연예기획사 대표는 개인정보가 누출되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아이돌그룹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풀기 어렵다는 아이폰 비밀번호를 아내에게 알려줬다. 부끄러운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삼아서.
3천 원짜리 커피 배달료가 4천 원이어서 시민들이 분통을 터트린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니 선뜻 수긍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배달비는 배달하는데 드는 품을 따라 내는 게 합리적인데 그걸 가지고 화를 내는 것도 그렇고, 3천 원짜리 커피를 굳이 배달시키는 것도 별로 당연해 보이지 않는다.
‘염치(廉恥)’는 ‘부끄러움을 살필 줄 아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니 요즘 정치인에게 염치없다는 말은 과분하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살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자. 미루면 숙제가 되고, 숙제가 되면 소중한 일조차 짐이 되는 것이니.
기도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은 채로 해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때를 놓치면 기도할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기도한다 해도 잡다한 생각으로 마음이 이미 어지럽혀져 있어서 깊이 침잠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때로 그 시간이 짐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고비를 넘나들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기도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하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전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특권을 누려서 실망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그 특권을 정당화하고 나서서 절망하게 만든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 부끄러운 줄은 안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병이 깊어져 치료할 길이 없고 남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면, 그래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킬 수 없다면, 가족들 또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걸 용납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라에 공의가 무너지고 교회에 사랑이 사라져갈 때 국민으로서, 교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고 내 책임은 무엇인가.
사는 동안 몸이 아파서, 사는 게 어려워서, 부끄러운 짓을 해서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꿈꾸고 있다. 생각해보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구나.
역사학자인 김기흥 교수가 쓴 <역사적 예수>를 읽고, 또 후속 강의도 들으면서 성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역사학적인 연구방식으로 예수와 예수의 행적,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 낯설면서도 그 추론이 합리적으로 여겨져서 계속 강의를 따라가고 있다.
나는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기록이라는 김기흥 교수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서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덧입혀진 서사를 걷어내고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하려는 그의 시도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에는 가르침만 남을 것인데, 그것은 ‘존재 전체를 걸고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이치를 사유(思惟)하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올해 들어서면서 서평을 쓰고 있다. 스무 편쯤 썼는데, 읽고 쓰는 일이 만만치 않으니 시간도 잘 가고 두뇌운동도 되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고. 백 편을 목표로 했는데, 오백 편쯤으로 늘려야 할까보다.
요즘은 팟캐스트 방송에 유튜브까지 수준 높은 강의가 사방에 넘쳐난다. 각계 전문가부터 취미로 여기기엔 수준이 너무 높은 아마추어까지. 경제면 경제, 과학이면 과학, 종교면 종교. 예전에는 그런 강의 하나 들으려고 사방에 수소문하고, 시간 내어 찾아가고, 거기에 비용 부담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전문적인 식견을 얻을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은 또 어찌나 많은지. 랩탑에 모바일 하나 있으면 이 모든 콘텐츠를 언제든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써먹을 곳도 없는 잡지식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쌓여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라는 것이다. 그저 이름으로나 알고 있는 명사의 글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언제든 물을 수 있고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랍지 않은가? 때론 온라인 교류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명사들이 열 손가락을 훌쩍 넘는다. 돌아가면 그동안 배운 값으로 식사 대접을 했으면 하는데, 그것도 한 해 소일거리는 되겠다.
쉰이 넘으면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실천한다. 그래서 절대로 뛰지 않는다. 하지만 걷는 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다섯 해 가까이 하루걸러 10km씩 걷는다. 주말이나 휴가 때는 하루마저 거르지 않는다. 열사의 사막에서 그늘 하나 없는 곳을 걸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저 실내에서 개미 쳇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한국에는 걸을 곳이 지천에 널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바쁘겠다.
백수친구가 한둘이 아니어서 그들 노는데 끼워 달라 할까 했는데, 이젠 배짱을 튕겨야 할 모양이다. 아무튼 은퇴가 이렇게 기다려질지 몰랐다.
“나는 그간 수쿠크법을 막는 데 최선봉에 섰다. 동성애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며, 종교인 과세를 전략적으로 대처했을 뿐 아니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막는 최선두에 섰다.”
어느 총회장 취임사라고 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교회를 지킬 때가 아니라 허물 때이다.
민원실에 첫 출근한 새내기 공무원이 사망 신고하러 온 민원인에게 본인이시냐고 물었단다. 그러고 보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겠다. 내 신원에 대한 신고조차 스스로 못할 수 있으니.
번민 중에 감사할 조건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번민 중에 있다고 감사할 조건이 없는 건 아니니 찾으려 들면 찾아지게 마련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다 보면 번민과 맞설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는 일은 믿는 이들이 행하여야 할 의무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몇 구절을 들겠지만, 어느 구절을 가장 의지하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라”는 말씀을 꼽겠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쳤을 때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그렇고, 누군가 고통을 당할 때 특히 그렇다.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특히 사람을 바꾸어놓는 여러 원인 중에 그만한 것이 없다. 예전엔 내가 참 차가웠다. 좋게 말해 그렇고, 쌀쌀맞고 싹수없을 뿐 아니라 이기적이었다. 다행히 흐르는 시간 덕에 조금씩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기도 한다. 참 감사한 일이다.
몇 년 째 발주처와 소송을 벌이느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선뜻 그것을 고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습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이 이미 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것이 나이 탓인 줄 알았다. 오늘 아침 문득 오래 전에 이렇게 구했던 것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2014년이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내 시선을 함께 두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일에,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일에, 하나님의 격려를 전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려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미는 일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정녕 옳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언젠가 세상에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고 교회가 바로 서는 날이 오기는 하겠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