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은혜를 감사하며 산다. 구하지 않을 때에도 같은 것을 공급하셨지만, 그때는 그것이 은혜인 줄 몰랐다. 좀 더 일찍 구했더라면, 그래서 좀 더 일찍 감사할 수 있었더라면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웠을 것인데.
가축 전염병이 돌 때 몰살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식육 대량생산을 위해 유전형질을 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식육 대량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전염병으로 인한 몰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늘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은 의사결정권이 ‘오륙십 대 기득권 남성’에게 쏠려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사결정이 같은 유전형질을 띄고 있다는 것이니 위기가 닥쳤을 때 의사결정을 내린 당사자는 물론 모든 구성원까지 몰살을 피하기 어렵지 않겠나. 이 틀을 깨지 않는 한 그로 인한 피해가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다양성’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상황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고,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도 하고,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코로나의 여파는 엄청나다. 생각해보니 이 모든 변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거나, 그렇게 되었어야 할 것인데 여러 이유로 주춤대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일도 없겠고, 그렇게 기대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겠다.
평생 장로교회를 다녀서인지 성찬을 그저 교회 절기나 되어야 행하는 전례의 하나로 여겼다. 개신교라는 것이 형식에 얽매어 본질을 잃어버린 구교에 저항해 생겨난 것이니 전례의 의미도 그렇게 축소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개혁의 본질인 ‘복음의 회복’과 무관하게 망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형식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배의 모든 순서는 설교로 향한다. 그러다보니 설교와 설교를 전하는 목회자에 따라 교인의 신앙이 좌지우지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예배 중에 교인 스스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이 실종되어버렸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매달 성찬을 행하고 있어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성찬을 받기 위해 줄서있는 동안, 성찬을 받으면서, 성찬을 들기 전에 무릎 꿇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
루터는 <소교리문답> 서문에서 성찬에 참예하지도 않고 성례전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질타하며 “성찬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며 그래서 신자들이 목사를 재촉하여서라도 성찬을 베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 년에 최소한 네 번 성찬을 거행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행하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것을 마시라’하셨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년에 중앙루터교회를 찾았을 때 루터교회의 예전이 일반적인 개신교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함께 예배를 드리자니 처음에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배가 진행되면서 차츰 편안해졌고 그 예전이 교인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루터교회의 전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전염병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한지 일곱 달이 되어간다. 녹화된 영상으로 예배드리다 얼마 전부터 양방향 실시간으로 예배드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찬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난 주 어느 교회가 영상예배 드리면서 성찬을 나누었다. 각자가 떡과 포도주를 마련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니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우리 교우들도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곳은 걷기가 참 어렵다. 날씨가 덥기도 하고, 날씨가 더워 걷지 못하니 걸을만한 길도 변변히 만들어놓은 게 없다. 사막 한복판이어서 숲길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간혹 친구들이 올리는 개천길이며 둘레길 걷는 사진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얼마 전 친구 하나가 안산둘레길 사진을 올렸다. 시내 한복판인 그곳에 그렇게 깊은 숲길이 있었는지 몰랐다. 길은 또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잘 만들어놨던지.
서울 집 뒤로는 백련산, 앞으로는 홍제천길, 조금 걸어가면 안산둘레길. 북한산이 시작되는 구기동도 욕심내서 걸어갈 정도이니 시간이 없어 못 걷지 갈 곳이 없지는 않겠다. 버스 몇 정거장이면 남산성곽길도 갈 수 있는데. 언제나 그 길을 걸을 수 있으려는지.
어른이라면 자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설 자리,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 어른이라면 때를 알아야 한다. 나설 때, 물러설 때, 그리고 돌아설 때.
지금까지 계획 없이 살아오지 않았고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게 아주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계획과 무관한 결과를 얻었다. 그래도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계획을 이루기 위해 힘을 흩트리지 않고 한곳으로 쏟아 부은 것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니, 계획이 영 쓸모없던 건 아니었다.
환갑을 맞고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를 꿈꿨다. 누구는 죽을 만큼 고독할 때 가는 길이라고 했고, 누구는 걷는 도중 성령의 만지심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고 했고, 누구는 거기 가려고 스페인어를 배운다고도 했다. 800킬로미터, 사십 여일 가까이 걸린다니 휴가를 얻어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어서 은퇴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부부가 함께 간다고도 하더라만 무릎이 좋지 않은 아내는 일찌감치 사양했다.
갈 수 있는 날이 멀기도 했고 충분히 훈련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가기 전에 그 거리를 열 번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걷기 시작했다. 한 번에 10킬로미터씩. 설마 열 번 걷기 전에는 갈 줄 알았다. 어제까지 4년 넘게 걸은 게 7,600킬로미터. 곧 열 번을 채우겠는데,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걸어야 할 모양이다. 미뤄진 것이 섭섭하기는 하지만 막상 다녀오고 나면 허망하지 않을까 싶어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하긴 요즘 둘레길 개천길에 성곽길까지 걸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니고 국도 따라 동해바닷길 걷는 것도 기가 막힐 것이니 그런 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기는 하겠다.
방역을 위해 해외여행 자제를 부탁하는 주무장관의 남편이 평생의 꿈이었던 요트여행을 위해 출국한 것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장관이 진솔하게 사과한데다가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로망을 이야기하고 부인들은 부인들대로 말 안 들어먹는 남편들 흉보느라 정작 당사자는 안중에 없으니 며칠 그러다 말겠다. 덕분에 나도 로망을 다시 불러냈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다했으나 계획대로 이루어 진 것은 다섯 손가락을 꼽기도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계획을 감당할만한 역량이 내게 없었다. 먼저 내 역량을 제대로 살핀 후 그에 맞는 계획을 세우던지 아니면 역량을 키우는 일에 힘써야 했다. 그래야했는데 이도저도 다 놓치고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한탄했다. 깨닫기는 했는데, 너무 늦었다.
이곳에서 이루어야할 소명이 있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것이 내 희망이요 욕심인 것을 알았다. 소명을 목표 삼아 걸어왔는데 소명이 없어지니 목표를 잃었다. 목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인데. 그러면 내 목표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운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니 목적은 물리적인 것일 수 없었다. 어쩌면 지향해야 할 가치, 삶의 철학일지도 모르겠다. 지향한다는 것은 걸어가는 방향을 일컫는 말이지 도달해야 할 지점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그 길을 온전히 걷지는 못했을지라도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면 ‘지향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궁극에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로 대치할 수도 있겠다.
목표로 삼고 살았던 소명은 기실 목적이었어야 했다. 그것을 목표로 오해했고, 목표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잠시 목적마저 잃었다. 그러나 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나는 목적을 잃은 적이 없었고, 삶의 목적이 소명이었다면 그것으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선동열은 그의 자서전에서 “투수에게는 ‘최고 구속’보다 ‘강속구를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폼’이 중요하다. 투수의 본질은 강속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순간 좋은 실적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실적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하다. 사업의 본질은 ‘살아남아서’ 이익을 ‘계속’ 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약자와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칫 ‘사람에게 남을 차별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약자와 소수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어 부적절하다. 어느 누구도 남을 차별할 권리는 없으며, 약자와 소수자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할 존재이지 보호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살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지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바른 길만 걸을까. 길이 막히기도 할 것이고 때로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겠다. 그러나 지향을 잃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그 길에서 벗어난 것을 의식할 것이고, 끝내는 그 길로 돌아오게 되지 않겠나. 그 정도면 칭찬은 받지 못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은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상급자가 받는 월급엔 하급자의 불평을 들어주는 값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스스로 상급자라고 여기거든 하급자의 불평 듣는 걸 마다하지 말라.
이런저런 이유로 몇 년 전부터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오고 있다. 때로 하루쯤 건너뛰고도 싶고, 힘에 부치면 도중에 그만두고 싶기도 하다. 그럴 때면 꾀가 나면 하루 건너뛰고 힘겨우면 도중에 그만두고 그런 거지, 뭐 한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매달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무설탕 다이어트로 체중을 크게 줄이고 나서 지금까지 단것을 멀리하고 있다. 단것은 자체 열량이 체중을 늘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포만감을 줄이고 식탐을 늘려 결국은 식사량을 늘이는 게 더 큰 문제다. 몸이 피곤하면 단것이 당기게 마련인데, 얼마 전에 운동 마치고 작은 초코바 하나 까먹은 게 그새 습관이 되었다. 초코바 하나씩 꺼내먹으면서도 식사량이 늘지 않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요 며칠 밥 먹고 나서도 헛헛한 생각이 들어서 자꾸 이것저것 손이 가기 시작했다.
운동을 덜 한다고, 가끔씩 단것에 손댄다고 당장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 작은 유혹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 큰 유혹을 견디겠나 싶기도 하고, 둑 터지는 것도 작은 구멍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아예 여지를 없애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다시 한 번 긴장의 끈을 조인다.
지향을 잃지 않는 것
평생 하나님 나라를 꿈꿨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했으니 이후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소망으로 선뜻 따라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글 번역기 수준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다. 이제 아랍어-영어 번역은 손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사용량이 늘어나니 학습효과로 좋아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아랍어 사용자는 3억 명쯤으로 중국어ㆍ영어ㆍ스페인어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번역기 사용량도 그에 비례할 것이고, 그만큼 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그것이 다시 사용자 증가로 이어질 것이니, 앞으로는 수준이 높아질 일만 남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어는 한참 못 미친다. 그렇기는 해도 문맥을 파악할 정도는 되어서, 분량이 많은 문서를 검토할 때 어디를 주의 깊게 봐야하는지 판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얼마 전에 ‘사흘’이 3일인지 4일인지 혼동하는 엉뚱한 일이 일어났을 때 ‘파파고’가 ‘구글’보다 낫더라는 이야기를 들어 그 후로는 ‘파파고’를 주로 사용한다. 어제 보니 조금 손보면 쓸 수 있을 만큼 되었다.
은퇴하고 나서 번역으로 용돈벌이나 해볼까 생각했는데, 완전히 물 건너갔다.
살아오면서 마음에 격동이 일어난 일이 수없이 많았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몇 년 만 앞을 내다볼 수 있었어도 지옥을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그걸 내다보지 못해 어리석은 세월을 살았다.
트럼프가 당선 되었을 때 어지간할 거라고 짐작은 했어도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거짓말이라고 드러났는데도 뻔뻔하게 그 주장을 이어가는 그를 보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드러내놓고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그를 보면서, 그 여파인지 우리 정치인들도 빼다 박은 짓을 하면서도 오히려 당당해하는 걸 보면서 하루 빨리 그 꼴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바이든이라고 속마음이 크게 다르기야 하겠나만, 그래도 할 말 못할 말은 가려가면서 하고 잘못이 드러났으면 부끄러워할 줄은 아는 사람으로 보여서 그가 당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여론조사로는 앞선다고는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랬으니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다. 그나마 그에게 기우는 듯했던 판세가 요 며칠 새 다시 백중세로 변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어쩌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에 이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국말은 동사에 해당하는 말이 문장 맨 뒤에 나온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면 주어와 동사가 벌어져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가급적 단문을 쓰는 것이 좋다”는 글을 읽었다. 나 역시 단문을 선호하기는 하는데, 이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입으로 글을 쓴다. 글 쓸 거리가 생기면 입 밖으로 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지 살핀다. 글을 써놓고 나서도 몇 번이나 읽는다. 읽는데 말이 꼬이면 고치고 한 번에 읽어지지 않으면 또 손대고 그렇게 한다. 글을 올려놓고도 또 읽고 또 고친다. 그래서 올려놓은 글이 수시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글이 짧아지고 선명해진다.
그러고 보면 복문은 글말이지 입말은 아닌 것 같다. 복문처럼 말하는 경우는 드무니 말이다.
주식시장에서 악재 소문이 나면 주가가 떨어지고 그 악재가 사실로 드러나면 오히려 안정된다고 한다. 불확실성이 제거되는 것이 악재보다 낫다는 것이다. 내가 왜 트럼프 재선에 그렇게 부정적인가 생각해보니 도무지 그의 판단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의 판단과 결정이 세계 여러 곳 여러 문제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니 그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불확실성이 어디 있겠나 싶기 때문이다. 나는 주식시장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주식투자도 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삶이란 지향을 잃지 않는 것이고, 지향을 잃지 않는다면 소명을 이루었다 할 수 있겠는데, 정작 무엇을 지향했는지 선명하지 않다. 그간 내가 지향해온 것이 무엇이었나?
예전에도 그 같은 인간은 사회에나 교회에나 널려있었는데, 유독 지금 그런 인간들이 득세하는 이유가 뭘까?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다. 그런데도 약자라 소수자라 불리며 멸시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멸시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어쩌면 그들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생각일지 모른다. 남을 멸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데, 누군가 그들을 멸시하는 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국민으로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아마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걱정을 걱정으로만 담아두고 목소리를 내지 않아 그렇게 되었고, 목소리를 내니 세상이 바뀌더라 싶어 그때부터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요즘은 목소리가 너무 많고 너무 높아 어지럽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참으로 옳다. 나라도 목소리를 낮추어야겠다.
작금의 교계 행태를 보면 기독교 몰락이 멀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염려와 질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정도 목소리로 바로잡는 건 어림없는 일이다. 나랏일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데, 최대종파라는 기독교에서는 왜 목소리가 이것 밖에 나오지 않는가? 교회가 본질을 회복할 때까지 힘을 다해 목소리를 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안될 것 같으면 차라리 한국 교회를 무너뜨려주시기를 기도하겠다. 무너뜨리고 새로 세우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니 말이다.
기도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해야 한다. 마음이 늘 흙탕물이어도 그때쯤엔 가라앉아 있어 어렵지 않게 기도에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는 잠시만 눈을 돌려도 곧 마음에 흙탕물이 이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 시간을 놓쳐 기도를 시작은 했으나 기도에 깊이 들지 못하고 이러고 있다.
평소에 인간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이던 어떤 이가 과를 이유로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글을 읽었다. 과가 있다고 공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과 때문에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인데. 문득 그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이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위폐(僞幣)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진폐(眞幣)에 익숙해야 하듯, 기독교 본질을 훼손하는 일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기독교 본질의 삶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이 틀린 것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는 동안 내 힘으로 걷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