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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29. 2021

법의 이유

국가ㆍ형벌ㆍ권리ㆍ자유

홍성수

아르테

2019년 11월


사법 불신


2015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OECD 국가 평균치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법 개혁에 대한 요구가 분출된 게 필연적인 것이고, 그 근간에는 이번 정부 들어 봇물처럼 터져 나온 재판 거래와 검찰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렇기는 한데 한 편으로는 그것이 대다수의 공통된 의견인지 의아하다. 정의가 바로 서고 그러기 위해 법이 바로 서는 일이 중요하다는데 이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인들의 삶과 크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법정에서 말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판결을 받아들어야 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불만이 사법 불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물론 하루하루 바쁘게 일상을 이어나가는 평범한 시민이라고 해서 정의에 둔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내가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은 일에 대해 분노를 이어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라면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재판의 결과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재판은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고 진 쪽은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기는 불만이야 전 세계 어느 법원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진다면 그 불만의 수준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야기도 못 해보고 졌다거나 설명도 재대로 못 들어보고 졌다면 자연스럽게 사법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 1부 국가와 형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판사가 당사자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당사자들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필요한 내용을 조리 있게 진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당사자들이 사건 구성에 필요한 내용을 조리 있게 진술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2026년부터는 10년 이상 경력이 있어야 판사가 될 수 있다니 그때쯤이면 판사의 공판능력은 상당히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판사의 공판능력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이런 불만을 잠재울 수 없지 않겠나 싶다.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저자는 현실은 이런 기대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민사소송의 경우 30년 전에 비해 10배 정도 사건 수가 늘어났고 인당 GDP는 12배 늘었지만 법관은 3-4배 정도 느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지금 법관이 30년보다 3-4배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셈이다. 게다가 경제가 발전한 만큼 사건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재판이 진행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사법 불신은 권력의 가진 자들의 농단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주장은 사법 불신이 인력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한 조직의 문제이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인력이 보강되고 예산이 확보되면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인력이 보강될 경우 그만큼 자기가 가진 기득권이 약화된다고 생각해서 비협조적이거나 더 나아가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난관을 넘어 법관이 크게 확충되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소송 당사자들이 자기 입장을 소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사법 신뢰는 회복될 수 있을까?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법관이 공판을 잘 이끈다고 해서, 당사자들이 자기 입장을 잘 진술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모든 당사자들이 그 기회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헌법 제12조는 누구든지 체포나 구속을 당한 때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으며(제4항) 그 권리를 고지 받지 않고는 체포나 구속을 당하지 않는다고(제5항) 명시하고 있다. 누구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변호인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국선변호인도 있고 형사당직변호사도 있기는 하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소송당사자가 된 일이 있었다. 업무방해금지 신청을 한 상황이었으니 칼자루를 잡은 셈이었고 회사에서 유능한 변호사를 동원했으니 그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었다. 상대는 마을에 위험한 시설물이 들어오는 걸 반대한다는 이유로 졸지에 피고가 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가 계속 길을 막다가 끝내 구속되었다는 통보를 받고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 처지였다면 법은 힘 있는 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판을 충실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법관을 늘리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국선변호의 대상을 획기적으로 늘린다고 하자. 그러면 법이 힘없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장치가 되기는 할까? 그래도 법은 권력의 편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라도 시원하게 해볼 수 있다면 재판에 진 것이 한으로 남지는 않지 않을까 모르겠다. 사법 불신도 조금은 덜어질 것이고.


형벌의 목적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사형에 반대한다. 오심이 확인될 경우 처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혹한 범죄에 대해서는 엄벌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한다. 저자는 엄벌은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범죄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벌은 죄에 대한 처벌, 범죄자에 대한 교화, 범죄 예방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죄에 대한 처벌이나 범죄자에 대한 교화도 결국은 범죄 예방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엄벌이 범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논리적으로는 엄벌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범죄 피해자에 대한 신원(伸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만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자기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범죄자에 대해 처벌이 미약하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매우 많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 단지 범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벌을 지양하자는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현대 형벌론에서는 응보보다는 책임을 형벌의 새로운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데, 범죄란 인간에게 부여된 윤리적 자기 결정능력을 위반한 것이니 형벌은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형벌은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남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를 줄이는 데는 법정형을 높이는 것보다 검거율을 높이는 것이 더 좋은 대안이라고 소개한다. 형이 높아진다고 잠재적 범죄자들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지만 무조건 잡힌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범죄는 처벌로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범죄정책은 가장 좋은 사회정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거율을 높이는 게 쉬운 일이었다면 지금 그런 요구가 나왔겠으며 사회정책이 쉽게 개선될 수 있었다면 그런 주장이 나왔겠는가. 하지만 지금과 같이 잘못된 사회구조 아래서는 범죄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처벌에 집중하는 건 효과가 없다면 처벌의 강도와 양을 늘리는 대신 관심을 검거율을 높이거나 사회정책을 개선하는 것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길이지만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국가 개입의 최소화


최근 여당에서 허위 조작 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발의해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다. 과연 허위보도나 조작보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고의성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불분명한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보도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전략적 봉쇄 전략’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이유로 일부 정치권을 제외한 대다수의 언론은 진영을 막론하고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법적으로는 명예훼손죄로 처벌이 가능하고 언론중재위나 재판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인정하는 건 언론사의 언론 출판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어 위헌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저자는 “비도덕적 행위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크지 않거나 구체적 법익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없는 경우에는 국가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 형법의 추세”라는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인용하며 국가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법과 상식의 딜레마인데, 이를 빠져나오려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상식(또는 도덕)을 내세우기보다는 권리를 기준으로 삼는 게 좋다고 말한다. 저자는 음란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음란물의 경우 도덕(또는 정서)에 어긋나서 보기 싫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답이 없다. 그보다는 음란물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했는지 세심하게 따져야 한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촬영되거나 배포된 불법 촬영물은 당사자의 사생활과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니까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논리라면 불분명한 기준으로 보도를 통제하려 든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보도 자체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기보다는 그로 인한 피해가 특정되었을 때 충분한 보상이 되도록, 그래서 그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엄벌이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생각만큼 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범죄예방이 목적이 아니라 화풀이 수단에 불과한 건 아닐까 싶은 ‘합리적 의심’이 든다.)


홍성수 교수


언제부턴가 차별과 혐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차별금지법’ 추진 과정과 좌절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러는 중에 홍성수 교수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법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서 그의 말과 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풀어낸 그의 전작 <말이 칼이 될 때>를 읽으면서 평이한 언어로 쉽지 않은 내용을 설명한 그의 글에 매료되었다. 두 번 읽을 필요 없이 한 번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글을 쓰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영화로 이해하는 시민의 교양>이라는 이번 책의 부제만으로도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지루하지 않게, 쉽게, 한 번 읽는 것으로 그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혼동해왔던 용어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피의자(범죄 혐의가 있어 입건된 사람)와 피고인(검사가 기소해 재판에 넘겨진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피고인과 피고(민사소송에서 소송을 당한 사람)가 같은 말인지 아닌지, 변호사(자격을 가진 전문인. 민사소송에서는 소송대리인 형사소송에서는 변호인)와 변호인(형사 소송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하는 사람)의 차이가 뭔지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변호사들이 경찰서 유치장을 순회하며 상담도 하고 긴급한 경우 경찰서로 달려가 도와주는 당직변호사 제도가 있으니 일단 체포되면 당황하지 말고 형사당직변호상황실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하라는 조언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팁이 아닐 수 없다. (쓸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 가능하고 별도 비용은 없다고 한다.


인상적인 문장 하나를 꼽자면...


“사법에서 중요한 것은 공정한 외관이다. 외관상의 공정성이 실질적인 공정성을 낳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사법이다. 실제로 공정한 결과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더라도 외관상 문제가 있으면 바꾸는 게 맞다.” - 1부 국가와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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