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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1. 2021

[사우디 이야기 64] 불공정

사우디 이야기 (64)

주베일 현장을 시작할 때 협력업체에게 견적을 받으면서 수행계획서도 함께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우디에서는 한 번도 수행된 일이 없는 오염복원사업이다 보니 과연 그 작업이 어떤 성격인지 제대로 알고 견적을 제출했는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출한 견적이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뜻밖에도 상대가 딱 잘라 거절했다. 굳이 수행계획서를 받아야겠으면 작성비용을 내라고 했다.


전혀 낯선 일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사업계획을 검토하기 위해 현지업체 몇 곳에 견적을 요청했다가 견적비용을 달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기는 했다. (한국에서는 요청을 거절하면 했지 견적비용을 달라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때는 계약하자고 견적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시장조사를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계약을 맺기 위해 견적을 검토하면서 그 견적의 근거를 달라는데 비용을 달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들이 상식에 어긋난 대답을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부임한 첫 해에 조금은 엉뚱한 설계용역 입찰이 발주되었다. 철도청에서 리야드-담맘 열차 운행속도를 시속 200km까지 올리기 위해 그 구간에 있는 교량 네 곳을 보강하겠다는 것이었다. 보강설계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문제는 교량 네 곳 모두 설계서가 분실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교량을 조사해서 설계서를 복원하고, 복원한 설계서를 바탕으로 보강설계를 해야 했다. 보강설계도 해보고 설계복원도 해봤지만 복원한 설계서를 근거로 보강설계를 해본 일은 없어서 꽤 시간을 들여 현장을 답사하고 기술제안서를 작성해 입찰서를 제출했다. 첫 사업인지라 더욱 신경 써서 작성하다 보니 기술제안서만 무려 120페이지가 넘었다.


입찰마감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차일피일 발표를 미루던 어느 날 언제쯤 결과를 발표하느냐 물으니 입찰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얼마 후 재입찰 공고가 났다. 놀랍게도 우리가 제출한 기술제안서 내용을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과업설명서에 그대로 넣어놓았다. 정부기관에서 기업의 아이디어를 도둑질한 셈이다. 황당한 것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기술용역 입찰은 먼저 기술평가를 한 후에 기준을 통과한 업체만 가격을 개봉해 최종 낙찰자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는데, 기술제안 내용이 업무 표준으로 인정받은 우리는 기술평가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한 번은 이곳 교민 하나가 좋은 사업을 연결시켜주겠다면서 본사에 찾아왔더란다. 연락해보니 화학공장을 건설할 계획인데 기술제안서를 보내주면 우리와 계약하는 걸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두 번은 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해달라는 거 다해준다고 회신하면서 제안서 작성비용을 함께 제출했다. 그쪽 책임자쯤 되는 이가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이 사업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돈을 달라는 거냐고 힐난했다. 더 시간 끌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으로 끝냈다. 그 교민이 본사에 이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는데, 아마 발주처가 맨입으로 기술만 챙기려 한 걸 몰랐던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그걸 알면서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관공서고 민간기업이고 필요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하는 걸 몇 번 당하고 나서 보니 우리가 협력업체에게 견적과 수행계획서를 함께 제출하라고 했을 때 그들이 뜨악하게 반응한 것이 무리한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어렵게 다리를 놓아 어느 도시의 시장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사업분야를 소개하고 그 도시의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선처를 요청했다. 시장이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했고, 덕분에 그 후로 몇 번이나 시장과 국장을 만나면서 몇 가지 사업을 제안했다. 어느 날 회의가 끝났는데 시장이 보잔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시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니 나만 들어오라고 했다. 자기 동생이 생수공장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참고할 만한 좋은 한국모델을 봤다며 그 공장을 설계한 회사를 찾아달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설계한 공장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반색을 하더니 역시나 생수공장 사업계획서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제안한 사업으로 화제를 돌렸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있을까.


회의에서 돌아온 후 사업계획서 작성비용이 얼마나 될지, 우리가 제안한 사업이 성사되었을 때 그 비용만큼 보상받을 수 있을지, 제안사업이 성사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곰곰이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 요청할 게 사업계획서 하나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갖은 이유를 대며 추가적인 지원을 요구할 게 눈에 뻔히 보였고, 그런 걸 감수하기엔 우리 제안 사업의 성사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결론은 쉽게 내렸는데 문제는 우리가 아쉬운 처지에서 어떻게 거절을 해야 그동안 애써 쌓아놓은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본사와 함께 며칠 궁리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기술제안서를 작성해주겠다. 대신 공장 건설이 확정되면 설계는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기술제안서를 작성하려면 기술자들이 현장을 확인해야 하니 기술자 몇 명이 다녀갈 수 있게 항공권과 숙박만 제공해 달라. 기술용역은 기술자 인건비가 전부이지만 그동안 시장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배려를 생각해서 인건비는 받지 않겠다.”


사실 기술자 몇 명이 사우디 현장을 다녀갈 비용이면 작은 돈이 아닌데 그걸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생수공장 추진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럴 정도라면 사업계획서 작성 정도는 서비스하고 설계비를 받으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저 생수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료만 얻으려는 것일 테고. 예상했던 대로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대답이 없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시장을 만날 수 있었고 예의 친절한 배려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제안한 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물론 성사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결말이 맺어진 것이었겠다. 그래도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시장의 행동이 개운치 않았다.


부임 초기에 항만청 입찰에 여러 번 참가했다. 본사 한 해 용역 매출에 버금가는 대형 설계용역에 최저가 낙찰자로 선정되었는데 항만청에서 낙찰자 선정 통보도 하지 않고 2년 넘게 끌다가 일방적으로 입찰을 취소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항만 마스터플랜 설계용역이 발주되었다. 용역설명서에 분명하지 않은 항목이 있어 설명서에 적어놓은 담당자에게 문의 메일을 보내려는데 메일주소를 입력하려다 보니 이미 주소록에 등록된 것이었다. 항만청 출입하면서 알게 된 독일 설계사 직원의 메일이었던 것이다. 사우디는 1960년대 말에 독일과 기술협력 협약을 맺었고, 그때부터 독일은 철도ㆍ항만ㆍ항공과 같은 교통관련 부처에 기술자문을 수행해왔다. 그리고 그 직원은 기술자문을 담당한 회사 소속으로 항만청 기획부에 파견되어 사업발주에 간여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회사가 함께 입찰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수험생이 시험문제 출제자가 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현지법인 파트너에게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라고 요청했다. (우리 현지법인은 기술은 내가, 영업은 파트너가 책임을 맡고 있다.) 처음에는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면 펄펄 뛰던 파트너가 항만청과 접촉하고 나서는 실익이 없을 거라는 이유로 접자고 했다. 이 사람들은 워낙 그런 이야기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어서 더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뭔가 배려를 기대한 것이 아닌가 짐작만 했다. 이듬해 싱가포르 회사와 컨소시엄으로 참여한 또 다른 항만 마스터플랜에서 낙찰자로 선정되어 계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계약부서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싱가포르 회사의 자격을 문제 삼아 결국 계약에 실패했다. 이전에 있었던 입찰 불공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데 대한 배려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오히려 같은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건 사우디 사람들끼리 풀어야 하는 ‘사우디 이슈’라는 이유로 그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었다.


최근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발주처의 강력한 요청으로 사업계획과 입찰서류를 다 만들어주고 게다가 우리가 최저가를 제출했다. 입찰이 끝날 무렵에 발주처의 장이 경질되었고, 이유도 없이 입찰결과 발표가 미뤄지기 시작했다. 새로 부임한 발주처의 장을 만나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차질 없이 입찰과정을 마무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까, 정부 발주사업 입찰 포털에 그 입찰이 취소되었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이의 공문을 보내고 발주처의 장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면담은커녕 입찰 취소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 듣지 못한 채 포기해야 했다.


입찰방식이 되었던 견적방식이 되었던 사업을 발주한다는 건 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것이 사우디의 일반적인 경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술제안서를 비롯한 모든 입찰서류를 접수하고 나서 정당한 이유 없이 입찰을 취소하고 (제출한 서류가 다 공개되었을 것이라는 의심도 들고), 낙찰되었는데도 통보도 하지 않고 입찰 자체를 취소하고, 낙찰자 선정 통보를 한 사업도 뒤늦게 입찰 자격을 문제 삼아 부적격 처리하고, 더욱이 그런 내용에 대한 이의절차조차 없는 이곳, 게다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기술력을 무상으로 탈취하려는 이곳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을 기대하는 게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물론 이것을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텐데, 그렇다 해도 딱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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