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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03. 2021

[사우디 이야기 63] 한국의 이미지

사우디 이야기 (63)

초기에 방문비자로 머물 때 출장을 다녀오다가 고속도로 검문소에서 일이 생겼다. 검문소에 들어서면서 제 때 속도를 줄이지 못해 과속방지턱을 요란하게 넘었는데, 이 모습을 본 경찰이 뛰어나오면서 차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당시에는 국제운전면허증을 묵인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어서 국제운전면허증만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곤경을 겪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랍말로 뭐라고 하는 중에 ‘라이센스’라는 말이 들렸다. 하지만 못 알아들은 척 하고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한참 살펴보던 경찰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꼬리(이곳에서는 한국을 그렇게 부른다)’라면서 뭐라 뭐라 하더니 비켜서면서 얼른 가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겪은 건 처음이었다.


법인을 처음 세울 때 파트너 회사 직원들 국적이 아주 다양했다. 임원급은 사우디ㆍ미국 출신이었고 직원들은 가까이는 레바논ㆍ요르단ㆍ시리아ㆍ이집트ㆍ팔레스타인ㆍ수단ㆍ에티오피아ㆍ예멘ㆍ소말리아, 멀리는 인도ㆍ파키스탄ㆍ방글라데시ㆍ필리핀ㆍ말레이시아와 같이 출신이 매우 다양했는데, 그 중 인도인이 절반이 넘었다. 한국인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합류했다. 출근해 보니 직원들 사이에 서열이 느껴졌고 그것이 국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중에서 나는 대접을 받는 편이었는데, 그게 책임자로 부임했기 때문이었는지 국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이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법인 설립 때문에 은행에 갔을 때 지점장이 입이 마르도록 한국 칭찬을 했다. 그렇게 여겨줘서 고맙다고 몇 번씩 인사를 해도 계속 칭찬을 이어갔다. 고객에게 하는 립서비스 치고는 요란하다 싶어 이유를 물어봤다.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한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머리에 물을 뒤집어 써가며 일하고 밤에는 횃불을 켜놓고 일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근면 성실하다는 이야기였다. 듣다 보니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결국 자기네한테 고용된 사람치고는 일을 잘하더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의도를 깔고 이야기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 속에 한국은 고용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각자 다른 이유로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다. 나이든 사우디 사람들은 한국인의 근면성실함을 칭찬한다. 그것은 자기네가 우리를 부렸다는 우월감과 자기들에게서 벌어간 돈으로 산업화를 일구어냈다는 ‘시혜적인 관점’에서 기특함ㆍ대견함이 바탕에 어우러진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꼬인 생각일까? 그런데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말 속에 그런 느낌이 강하게 배어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은 산업화가 앞서간 나라라는 이유로 한국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 말 하면서 하나같이 삼성폰을 들어 보인다.


젊은이들은 K팝ㆍK드라마 때문에 한국에 열광한다. 부임할 때쯤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방송됐다.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엘 갔는데 필리핀 간호사들이 반색을 하며 맞아줬다. 그러면서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탤런트 이름을 주워섬기는데, 드라마를 보지도 않은데다가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구별도 잘 못하니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드라마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사내들이 뭐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나 하고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못마땅해 하던 젊은 배우들 덕택에 아주 톡톡히 귀빈 대접을 받았다.


오래 전에 걸그룹ㆍ보이그룹이 나온 걸 보고 멤버가 한둘도 아닌데 저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살려는지 오지랖 넓게 걱정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노래가 K팝이라는 이름으로 사우디에서 붐을 일으키는 모습이 쉽게 눈에 뜨이고 한국말을 배우는 사우디 젊은 여성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두 해가 넘었지만 ‘슈퍼주니어’가 공연 온다고 들썩이는 것이나 ‘방탄소년단’이 온다고 했을 때 ‘슈퍼주니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온 도시가 발칵 뒤집어진 것도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지나가면 어떻게 알아보는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는 젊은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나는 십 년이 넘도록 이곳 말이라고는 간단한 인사 한두 마디 하는 게 전부인데, K팝ㆍK드라마로 우리말을 배웠다는 그들은 똑떨어지게 한국말을 한다.


이처럼 대체로 호의적이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십 년쯤 전 이 대통령 국빈 방문 때 일이다. 대통령이 양국 기업인을 초청해 베푼 오찬에 참석했다. 국빈 인사가 끝나고 사우디 상공부장관이 답사를 하는데 말 속에 뼈가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인데 우리 어려울 때 너희가 떠나지 않았느냐. 지금부터라도 사업 수주할 생각만 하지 말고 투자도 하면서 상생해나가자” 뭐 그런 취지의 말이었다. 온화한 표정에 부드러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골자는 비난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비난할 의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이미 사우디 기업인들에게서 “한국은 돈 벌어갈 줄만 알지 투자할 줄은 모른다”는 지적을 여러 차례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는 사우디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과민하게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도 간혹 나이든 사우디 기업인 중에 그런 느낌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우디 사람들은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그날 사우디 장관의 그런 발언은 그곳이 상대국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였다는 점에서 무례했고, 우리 기업인 참석자 중에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이곳 사람들이 한국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우리 국력이나 앞서가는 문화 트렌드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우디에 거주하는 교민이나 주재원들의 수준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재원이야 주택이나 교육과 같은 각종 복지가 잘 받쳐주고 있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곳에 오래 산 교민들도 결코 험한 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이곳 상업시설의 종업원은 대부분 외국인인데 그 중에 한국인은 본 일이 없다. 공사장에서도 협력업체를 운영하거나 최소한 책임자로 일하지 노무자로 일하는 경우도 본 일이 없다. 리야드에 있는 교민들은 대부분 주재원ㆍ현장근무자거나 자영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사우디 공기업 직원과 교수들도 점차 늘고 있다. 한국 간호사가 리야드에만 백여 명 가까이 된다는데, 그들 또한 우월한 능력을 갖춘 전문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우디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외국인근로자(foreign worker)와 가사근로자(domestic worker)로 구분한다. 가사근로자는 고용주가 기업이 아닌 개인이며, 주로 가정부와 가정운전기사이다. 노동부에서는 발급하는 이들의 취업비자가 다르고 통계청에서도 가사근로자를 일반근로자와 구별해 통계를 낼만큼 이들은 열등한 직종으로 취급받는다. 직업에 귀천이 없으니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가사근로자 출신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사근로자가 이곳에서 받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런 내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십 년 넘도록 가사근로자로 일하는 한국인을 본 일도 없고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처음 우리나라에서 중동에 진출할 때 사우디에서 가사근로자도 함께 보내주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서는 기술자ㆍ관리자와 근로자까지만 보내고 가사근로자 파견 요청은 거절했다. 일설에는 그것이 박 대통령의 결정이었다고도 한다. 아마 그때 가사근로자를 보냈다면 지금처럼 한국인 전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유지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삶이 어려웠어도 정부 차원에서 내보낸 인력은 모두 전문직이거나 기술직이었다. 그 어렵던 60년대에 내보낸 파독근로자도 광부와 간호사 아니었나.


부임하고서 나름 대접 받은 것이 직책 때문인지 국적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이 그 말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국적에 따라 일하는 분야나 회사 안에서의 위치가 대체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대체로 한국인은 이곳에서 평균 이상의 위치에서 평균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산다. 순전히 내 편견일 수 있는데, 이들은 사우디와 GCC 국민, 그리고 서구인들을 최상위에 놓는다. 그리고 험한 일을 하는 삼국인들을 최하위에 놓고. 우리는 최상위 바로 아래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외국이라고 살아본 건 이곳이 처음이다.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출장이나 관광으로 다녔으니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업신여김을 받을 일이 없었다. 요즘 들어 동양인 혐오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전에도 서구 국가에서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지만, 운 좋게도 나는 그런 경우를 겪어보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에게 보내는 부러운 눈길만 경험했지 한국을 업신여기는 건 물론 내 앞에서 한국을 비난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미국인 동료에게서 미묘한 우월감을 느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저 무시하면 되는 일이어서 개의치 않는다.


결국 예전에 우리 선배들이 보여줬던 투철한 책임감과 근면성실함,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산업화를 이루어냈으며 이제는 선진국의 반열에 든 저력, K팝ㆍK드라마로 대표되는 높은 현대문화의 힘, 거기에 굶더라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자존심으로 허드렛일 하는 사람은 내보내지 않은 정책적 결정이 사우디에서 한국의 위상을 지켜낼 수 있었던 동력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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