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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5. 2021

[사우디 이야기 65] 설계 시장

사우디 이야기 (65)

토목설계와 환경사업을 본업으로 하는 회사에서 마케팅만 책임지겠다는 현지회사와 합작법인을 세웠으니 당연히 그 분야의 사업부터 공략을 해야 했다. 현지회사에서 마케팅을 책임지겠다고는 했지만 기술적인 배경이 없이 특정 발주처와의 유대관계에 기대고 있는 처지여서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몸으로 부딪쳐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얻을 수 있는 도움이라야 면담 주선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공기업 발주 담당자를 찾아갔는데 대뜸 우리 회사의 ENR 순위가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물었다. ENR(Engineering News Record)이라는 잡지에서 매년 세계를 대상으로 건설관련기업의 분야별 지역별 순위를 발표하는데, 그 순위가 어느 정도냐고 물은 것이었다. 자기네는 5위권 기업만 상대하지만 10위권에 들어있다면 고려는 해볼 수 있다고 했다. 전체 순위는 물론 분야별 순위에 10위권에 들어간 한국회사를 찾아보기 어렵고 사우디에 진출한 외국기업 중에도 하나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의 기준을 요구하는 담당자를 보면서 ENR 순위가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싶었다. 그 후로도 그런 격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경우를 몇 번 더 보기는 했다. 아마 자기네가 그런 요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말이 내게는 자그마한 슈퍼 하나 지으면서 대형 복합쇼핑몰 지을 수 있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들렸다.


발주처 담당자를 만나보고 또 현지 설계사 책임자들을 만나면서 과연 사우디에서 설계를 수주하는 게 가능할지, 수주하더라도 과연 채산성을 맞출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우선 사우디 정부는 외국기업이 설계를 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문턱을 높여 놨다. 사업 면허를 얻기도 어렵고 제약이 매우 많아 면허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많은 외국기업이 발주 명목을 바꾸거나 예외 조항을 적용해 그 제한을 피해나가고 있었고, 그렇다면 그건 해결할 방법이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설계비가 우리 기준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토목설계의 경우, 한국에서는 설계비가 전체 사업비의 4.5~5.5% 정도에 이르는데 사우디 정부의 기준 설계비는 2.5%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2% 선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인건비가 높아 설계비를 제대로 받아도 꾸려가기 어려운데 설계비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난감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그 돈으로 설계를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우디 설계사는 대부분 외국 엔지니어로 이루어져있다. 우리 회사가 주업인 토목사업은 시공사에는 인도나 파키스탄 엔지니어가 많은데 비해 설계사에는 이집트를 비롯한 레바논ㆍ요르단ㆍ수단과 같은 중동 엔지니어들이 눈에 많이 뜨였다. 시공사 엔지니어들은 작성된 설계서를 따라 시공만 하면 되지만 설계사 엔지니어들은 설계도면 뿐 아니라 설계 근거와 설계보고서, 그리고 시공과정에 지켜야할 시방서 같은 설계도서를 모두 아랍어로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같은 설계라고 해도 토목설계와 플랜트설계는 사업발주 방식이나 설계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철도ㆍ도로ㆍ항만과 같은 토목사업은 설계와 시공을 분리해 발주하며 대체로 국내입찰에 붙인다. 석유화학공장ㆍ담수화공장ㆍ발전소와 같은 플랜트사업은 설계와 시공을 하나로 묶은 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방식으로 발주하며 대체로 국제입찰에 붙인다. 그러다 보니 토목사업은 설계를 발주처가 직접 발주하고 설계도서도 아랍어로 작성한다. 플랜트사업은 시공사와 설계사가 팀을 이루어 입찰에 참여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시공사가 설계사를 선정하는 셈이며, 따라서 발주처는 최종 설계도서를 평가할 뿐 설계사 선정이나 설계과정에 간여할 수 없고, 모든 설계도서는 영어로 작성한다.


주로 토목설계를 하는 사우디 설계사들은 앞서 말한 대로 중동 엔지니어로 이루어졌는데 급여가 한국 설계사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은 현지에서 채용된 인력이어서 여기서 받는 급여가 전부인데 반해 한국 설계사가 사우디에 엔지니어를 파견할 경우 해외수당이며 체재비를 감안하면 한국에서 받는 급여보다 최소한 50~70% 정도 늘어나서 그들과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물론 한국 엔지니어는 수준도 높고 업무강도도 높아서 전체적인 생산성의 격차가 이보다 좁혀지기는 한다. 그래도 그 격차를 만회하기 어려울 만큼 급여가 높다. 따라서 한국 엔지니어를 사우디에 투입하는 방안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고 주로 한국에서 설계하고 이곳에서는 수정ㆍ보완 정도만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설계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없다. 설계의 상당 부분을 다른 설계 내용을 가져와 현지여건에 맞도록 수정해서 사용한다. 설령 전혀 새로운 사업이라고 해도 인용하거나 참조하는 양이 적을 뿐이다. 그러니 현지 여건에 익숙하지 않으면 불리한 점이 여럿 있지만, 이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추가 인력이 필요할 뿐이다. 설계를 마치면 시방서(specification)라는 시공과정에서 지켜야할 절차서를 작성하는데, 이때 사우디 정부나 발주처의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에 익숙해질 때까지 역시 추가 인력이 필요하다. 설계 마지막 단계인 공사비 추정을 위해서는 현지 물가에 정통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건설 관련 물가를 조사해 발간하는 월간지가 몇 종 있는데 이곳은 오로지 설계사가 확보한 물가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필요한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상당한 인력을 투입해야 하고, 데이터가 축적될 때까지는 다른 설계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 또한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사우디 설계사 중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설계사가 적지 않다. 그들의 급여수준은 당연히 우리보다 높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본사에서 나온 엔지니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 현지에서 채용한 저임금 엔지니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앞서 언급한 신생 설계사의 경험 부족에 따른 격차를 해소하기까지 기존 설계사보다 훨씬 많은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하는데다가 급여까지 저렇게 차이가 나니 어떻게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세계적인 설계사들은 설계실적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많아서 기술평가에서도 그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다. (이곳은 한국과 달리 입찰서에 올려놓은 참여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도 없다. 그러다 보니 입찰서에 올라가 평가받는 엔지니어와 실제로 일하는 엔지니어가 다르다. 게다가 실제로 설계를 참여하는 엔지니어와는 무관한 설계사 본사의 실적을 그대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이라고 해도 부임 초기에 최저낙찰자로 선정된 대형 설계사업 몇 건을 계약으로 연결시켰더라면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라도 실적도 쌓고 자리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약에 이르지 못했고, 그 후로는 설계사 등록여건이 강화되어 한국에서 설계해서 가져오는 길조차 실질적으로 봉쇄되는 통에 결국 설계는 한 건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반 발주 대상인 토목설계는 접고 타당성평가ㆍ영향평가ㆍ마스터플랜과 같은 컨설팅 사업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이런 용역은 사업을 추진할지 여부를 가리는 초기단계에서 발주되고 그때까지 발주처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발주공고를 보고 덤벼봐야 그저 남의 들러리나 서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업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제안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사업영향을 평가하고 사업타당성을 입증하고 나면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때쯤이면 발주처 장의 임기가 끝나 새로운 장이 부임하고 왜 그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7~8년을 여기에 매달려 성사시킨 것이라고는 마스터플랜 하나와 타당성평가ㆍ영향평가 몇 건이 전부이고 본 사업에 착수한 것은 한 건도 없다.


사실 이런 용역 자체는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랜 기간 시장을 분석하고 대안을 세워 사업계획을 만들지만, 사업 아이디어라는 것이 돈으로 환산하는 게 어렵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실현되어야 비로소 그 진가를 인정받는다. 사업계획은 골격을 세우는 게 전부이다. 골격은 이 단계에서 이미 완성된 상태이고 만들어진 골격에 살을 붙이는 건 시간만 지나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러니 이 단계까지 이르면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 들어갈 노력은 다 들어간 것이지만 사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모든 수고는 그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실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지만 이미 그에 대한 용역비를 지불했다는 이유로 그 사업계획에 대한 소유권조차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설계사를 시켜 사업을 추진해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다는 건 다행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게 정말 다행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문제는 알았는데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앞으로 나아지기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그저 이런 실패가 누군가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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